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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과 일본의 번역 사업과 사상 수용- '자유'의 경우(下)

근대 번역의 역사-중국

by trans2be 2022. 3. 2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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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왕 샤오위(王暁雨)
출처: 東西學術硏究所紀要, 48, 關西大學. 2015.4, pp.173~186.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번역어 '자유'와 메이지 초기의 계몽 사상가들
Ⅲ. 근대 중국의 지식인과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한 논쟁
Ⅳ. 글을 마치며

 

Ⅲ. 근대 중국의 지식인과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한 논쟁


1. 내화(來華) 선교사와 '자유'라는 번역어

Morrison Robert's freedom in 英華字典
Morrison의 「화영자전(華英字典)」 에서의 'freedom' 뜻 풀이 

 1808년 「학술 선교(學術宣敎)」를 제출한 모리슨(Morrison Robert, 중국 이름 馬礼遜 1782~1834)은 향후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화영 자전(華英字典)」 편찬에 착수했다. 이 사전은 속속 출간되어 7년이 지난 후 마침내 1823년에 완성되었다(전체 6권-역자 주).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영중·중영 사전이었다. 이 사전(제6권, 181쪽-역자 주)에서 'freedom'은 '자주지리(自主之理)'로 번역되었다. 중국 문화를 잘 알고 있던 모리슨은 아마도 '자유'가 중국 전통 문맥에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음을 고려하여 '자주'라는 말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모리슨이 펴낸 사전은 이후의 영중·중영 사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주'라는 번역어도 여러 영중사전에 계승됐다.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1796~1857)의 「영한 자전(英漢字典)」에는 'freedom'을 '임의 천전(任意擅専)', '자주지사(自主之事)'라고 풀이했다. 새뮤얼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 1812~1884)의 「영화운부역개(英華韻府歷階)」에서 ‘liberty’에 관해서는 '자주(自主)', '불능 임의(不能任意)'라고 번역했다. 근대 일본 번역어에 큰 영향을 끼친 빌헬름 롭샤이트(Wilhelm Lobscheid, 1822~1893)의 「영화 자전(英華字典)」의 경우 ‘freedom’ 항목에 대해서는 ‘자주자(自主者), 치기지권(治己之權), 임의행지권(任意行之權)’으로, ‘liberty’에 대해서는 ‘자주, 자유, 치기지권(治己之權), 자조지권(自操之權), 자주지리(自主之理)’라고 번역하고 있다. 당시 내화 선교사 대부분은 중국 전통문화를 잘 알아서 'liberty'나 'freedom'의 번역어로 '자유'보다 '자주'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선교사들이 출판한 잡지나 신문에서도 거의 ‘자주’를 사용하고 있었다.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us Gützlaff, LMS, 1803~1851)는 1833년 광저우(廣州)에서 「동서양고매월통기전(東西洋考每月統紀傳)」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교의를 선전하는 한편, 서양의 정치와 문화 등을 소개했다. 유럽 각국의 정치 제도를 소개하는 글에서 자유 권리를 언급하면서 ‘자주지리(自主之理)’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또 1838년 3월 「자주지리(自主之理)」라는 글을 게재하여 평등사상과 언론 자유, 종교 자유의 권리를 소개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것도 '자주지리'였다.

'freedom' in Wilhelm Lobscheid, 
English and Chinese Dictionary
Wilhelm Lobscheid, 
English and Chinese Dictionary
Lobscheid의 「영화자전(英華字典)」(1867년 간) 'freedom' 항목의 뜻 풀이(제2권, 870~871면)


 그러나 선교사들이 만든 ‘자주지리’나 ‘자주’ 등의 번역어는 이 시기 중국에 전해진 서양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대만큼 중국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자유’는 가끔 외국 관계 문서나 문장에서나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868년 7월 28일에 조인한 「중미속증조약(中美續增條約)」에서는 "현재 양국 인민의 상호 왕래, 혹은 여행, 무역, 거주의 자유를 얻어야 비로소 이익됨이 있을 것(現在両国人民互相往来、或遊歴、或貿易、或久居、得以自由、方有利益)"과 같은 용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구속 없이’의 의미가 강해 전통적 의미와 가깝다고 본다. 1884년 「일본국지(日本國志)」에서 황준센(黃遵憲)은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타인에게 구속받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각자 몸을 갖고 있어 몸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윗사람이 억제도 속박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자유라는 말은 서양, 혹은 일본으로부터 이입된 개념으로 인신의 자유를 가리키며 타인에 의한 구속이나 속박도 일절 없이 자기 자신의 희망에 따라 행동해야 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황준센이 "윗사람이 억제도 속박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한 점이다. 이는 자유민권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또 1893년경 진치(陳熾)의 「용서(庸書)」에서는 "이러한 자유라는 말은 이쪽에서 노래하면 저쪽에서 맞장구를 치는 상황에 이르러 그 폐해가 이미 깊다(爾自由之説 此倡彼和 流弊已深)"고 비판하였다. 후치주(胡其柱)는 윗글에서 '자유'가 주어로 사용됨으로써 표현의 전환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 '자유'가 이미 근대적 문맥의 '자유'로 간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후치주가 지적한 전반부의 논리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뒷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의견이 다르다. 진치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자유'는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역시 전통적 맥락에서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판단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2. '자유'의 발흥과 자유사상의 이입

 청일전쟁 이후 지식인을 필두로 중국인은 처음으로 세계를 재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지식을 배우면서 일본이 그 중요한 루트 중 하나가 되었다. 서양으로부터 과학, 정치, 문화 등의 지식과 함께 '자유'라는 번역어도 중국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뒤 옌푸(嚴復)는 톈진(天津)에서 간행된 「직보(直報)」에 <논세변지극(論世變之極>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엄복은 중국이 서양보다 약한 원인을 '자유'로 압축 정리했다. 엔푸에 따르면 서양의 자유는 한계가 있는 '자유'이며 타인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중국 지식인이 두려워하여 반대하고 있는 '자유'와 다른 것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논변하고 있다. 옌푸가 행한 '자유'에 대한 평가, 이에 더하여 전통적인 '자유'와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점은 이 시대에는 물론 선진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옌푸가 자유를 제창했지만 아직 국민들은 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자유'라는 말 그리고 자유사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량치차오(梁啓超)의 선전 활동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으로 도망가기 전 량치차오는 '자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국에 적용할 수 있을지 회의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1898년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뒤 다양한 독서를 통해 사상이 확 달라졌다고 적고 있다. 1899년 량치차오는 「자유서」를 썼다. 1902년 「신민 총보(新民叢報)」에 <신민설>을 연재하였다.  「논 자유(論自由)」에서 량치차오는 자유를 높이 평가했다. “자유라는 것은 천하의 공리이자 삶의 요체(要具)이다.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량치차오는 '자유'라는 번역어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표현도 격렬하고 입장도 분명했다. 1900년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를 "오늘날의 시대 상황을 구하는 좋은 약(良藥)이자 둘도 없는 법문(法文)입니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또 설령 선생님이 반대하더라도 자유의 뜻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적고 있다. 「논 자유」의 서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열혈 청년들의 상투어가 됐다.


3. '자유'라는 번역어를 둘러싼 논쟁

 량치차오의 선전 활동과 함께 자유는 20세기 초 중국에 확산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유'라는 번역어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쟁도 지식인들 사이에 불거졌다. 장지동(張之洞)은 'liberty'를 '자주'로 번역한 것이 선교사의 잘못이라 힐난했다. 게다가 'liberty'는 '만사 공정(各事公正), 공중(公衆)에게 유리한 것'을 의미하므로, 'liberal party'를 '자유당(自由黨)'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당(公論黨)'으로 번역하는 편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보면 장지동이 '자유'라는 번역어에 그다지 찬성하고 있지 않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장지동의 비난에 대해 학자 허치(何啓), 후리위엔(胡禮垣)은 「『권학편』 서후(書後)에서 반론을 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liberty‘는 중용이 말하는 "천명(天命)은 성(性)이라 하며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하면 천명의 본성이 바로 선(善)인 것이다. 본연의 성에 따르는 그것이 '자유'인 것이다. 게다가 '자유'라는 번역어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어 그 말의 본의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인 취지는 번역되었다고 지적했다. 옌푸도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의 <번역 범례(譯凡例)>에서 장지동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옌푸 자신도 처음 크게 '자유'를 제창할 때와는 달리 '자유'라는 번역어의 오용을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On liberty』를 번역할 때 옌푸는 일부러 '자유'와 같은 발음의 '자유(自繇)'를 번역어로 선택하였다. 옌푸는 처음에 <On Liberty>를 자유석의(自釋義)'로 번역하였으나, 결국 「군기권계론」으로 고쳤다. 그 원인이라 한다면 역시 그 말의 부정적인 의미가 거슬렸을 것이다. 'liberty'라는 말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사회 질서를 전제로 한 개인의 자유를 가리키고 있다. 만약 한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멋대로 널리 퍼지게 되다가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말의 확립에 대하여 옌푸는 「군기권계론」의 <번역 범례>에서 적절한 번역어를 만드는 어려움에 대해 탄식한 바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繇)'라는 한자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결국 '자유'로 바꾼다.


 즉 자유라는 번역어의 확립은 전통적 문맥에서 벗어나 량치차오에 이르러 정해졌다. 근대 중국 지식인의 모색도, 서양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이나 검토도 '자유'라는 개념의 변용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량치차오가 이해하고 있는 '자유'에서 그는 서양이라는 콘텍스트에 입각한 천부인권 사상에 대해 극찬하면서도, 중국의 컨텍스트에 입각한 '제멋대로'의 의미를 제약하며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량치차오 자신에게 존재하는 모순이 아니라 그 개념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결정되었을 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분명 캉유웨이가 지적했듯이 '자유'라는 번역어가 일본에서 시작한 까닭에 그 말 자체가 서양의 '자유' 개념이 갖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 지식인이 사용한 '자유' 역시 서양의 '자유' 개념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더욱 이 개념에 근대 일본 지식인의 사유 방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일본으로부터 서양의 '자유' 개념을 수입하는 동시에 일본 지식인들의 이해 방식도 수입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근대 중국의 '자유' 개념의 변용은 전통적 가치관, 서양 가치관에 대한 인식에 더하여 일본 지식인의 서양 인식도 섞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Ⅳ. 글을 마치며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의 번역본 「자유지리」가 출간된 이후 당시의 지식인 특히 젊은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이 번역본이 소개한 서양의 자유사상은 일본 국민을 크게 계발하여 자유민권 운동을 촉발시켰다. 반면 중국인은 이 개념의 번역을 놓고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이유로 일본 번역본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일본의 번역본은 참고자료로서 중국 지식인에게 서양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시해주었지만, 동시에 일본인이 이해한 서양 역시 중국 지식인을 압박하였다. 쓰치야 히데오(土屋英雄)가 지적한 것처럼 량치차오의 권리 및 자유에 관한 논리는 일본인의 저작 또는 일본의 번역본을 '통(仲介)'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량치차오의 민권 사상은 자유를 중시하지만 평등을 경시하고, 집단(群體)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개인을 비난, 배척하고 있다. 그에 더해 약자의 '자기 존재를 추구해야 한다'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 '우승(優勝)을 추구해야 한다' '권리를 침해하는 강자와 싸워야 한다'고 량치차오는 더욱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직접 서양 사상을 섭취함으로써 량치차오는 자신의 사상 이론을 한층 다양화하고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 개념의 변용을 생각해 보면 최초의 중국 전통 문맥에 있어서의 '제멋대로'의 뜻으로부터 선교사에 의한 '리보디(丽波蒂, liberty)', '자주지리(自主之理)'에 이르러, 나아가 일본 지식인이 주장하는 '자유', '자주'로부터 중국 지식인이 이해한 '민권(民權)', '자유(自繇)'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 번역어가 정해졌다. 이 과정에서 근대 중국과 일본 양국은 번역을 통해 문화 교섭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교섭에 따라 서양 학문의 수용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 교류도, 민족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교류도, 자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명교류도 각각 행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양 세력의 진출에 의해 정치구조도 문명관도 재편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세계 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의식해 ’문명‘을 향해 과감히 전향하였다. 그 선택에 전념하면서 기존의 지식과 문화 구조를 비판적으로 따져 물으며 새로운 문화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애당초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이었던 중국은 먼저 문화적, 심리적 상실감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해야만 했다. 때문에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까지의 모색 과정은 일본보다 길었다. 일본에서는 전통문화나 학문으로부터의 속박은 있었지만 한자어를 사용하여 서양 문화를 번역하는 작업을 중국보다 자유롭게 행하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전통문화와의 구별과 한계에 구애받고 있었다. 이처럼 번역어에 대한 중일 양국의 서로 다른 자세는 실로 문화 수용에 있어서 중일 양국 지식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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