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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대(淸代) 번역자와 번역 대상의 변천

근대 번역의 역사-중국

by trans2be 2022. 5. 1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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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中国清朝における翻訳者および翻訳対象の変遷
저자: 永田小絵(나가타 사에), 獨協大学 國際教養學部 言語文化學科
출처: 通訳研究』 제6호, 日本通譯學會(JAIS), 2006, pp.207~224.

     
       

        목  차

Ⅰ. 서언
Ⅱ. 중국 번역사 개요
Ⅲ. 청대 언어 환경
Ⅳ. 외국인 주도의 번역과 통역
Ⅴ. 선교사의 역할

Ⅵ. 청의 번역론

Ⅶ. 양무운동과 번역 · 통역

Ⅷ. 청말 학술 번역

Ⅸ. 결어 



Ⅰ. 서언

  중국 청조의 약 300년에 걸친 역사는 명조에 대한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을 외래 민족인 만주족(滿人)이 제압하고 권좌에 등극하는 극적인 전개 과정을 통해 막을 열었다. 만주족은 처음부터 한족과 융화를 꾀하여, 공문서를 만주·중국·몽골 문자로 작성하기 위해 번역국(飜譯局)을 설치하고 조정 내에서 국내 사무 및 외교를 위한 번역 및 통역을 관장하였다. 이후 유럽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선교사에 의해 교리서(敎義書)나 실용서, 기술 관련 서적이 번역되었다. 청조 말기에는 서양의 실학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에 앞장선 린수(林紓, 1852~1924)를 대표로 하는 번역 소설 붐이 일어나, 이후 서구의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을 도입하려는 목적으로 외국어 학교나 번역서 · 인쇄소 등이 각지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외국어 학교로부터 세계에 파견된 유학생이 귀국하여 번역에 종사하기까지 번역이 외부의 힘에 도움을 받지 않고 22개 국어를 이해하고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을 하는 근대적 의미의 번역자가 나타나기까지는 청조 말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참고문헌으로는 중국사와 관련한 홍콩 및 타이완을 포함하여 중일 양국 언어로 된 문헌에서 관련 부분을 추출하는 한편, 중국 번역사전(中國飜譯事典)에서 인물, 관련 문헌, 개념 등을 참조하였다. 또한 번역 및 번역사에 관한 선행 연구로 마주이(馬祖毅)의 『중국 번역사(中國飜譯史)』, 리난추(黎難秋) 편 『중국 통역사(中國通譯史)』 등으로부터 상세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콩후이이(孔慧怡)의 논문 「중국 번역 전통의 몇 가지 특징(中國飜譯傳統的幾個特徵)」은 중국의 전통적인 번역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역사서로는 정사인 『청사고(淸史稿)』, 『만주실록(滿洲實錄)』 등을 참조할 수 있었다.

  본론에서는 청조에서 자국인에 의한 번역, 선교사에 의한 번역 및 통역, 양무운동의 성과로서의 번역이라는, 성격이 다른 세 종류의 번역을 다루었다. 각기 다른 번역자에 의한 다른 번역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국민을 계몽하며, 국익에 도움을 준다”라고 하는 가치관에 의해 항상 지지를 받은 것은 공통적이다.

  번역이 사회성을 지닌 일종의 무기라면 번역은 무엇에 대해 충실해야만 하는 것일까, 또는 원본(original text)에 충실한 것이 목표 언어 텍스트의 계몽성이나 수용 가능성, 예술성 또는 사회 진보에 대한 유익함을 손상할 우려가 있는 경우, 번역자는 어떠한 주체성을 발휘하고 어떠한 조작을 가해야 할 것일까? 본론에서는 청조의 번역자 및 번역 대상이 된 텍스트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이 분석을 통해 번역자의 주체성과 번역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검토하고자 한다.


Ⅱ. 중국 번역사 개요

  중국에는 동한(東漢) 시대부터 오사 운동 이전까지 3회의 번역 붐이 있었다고 한다. 이하에서는 본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중국 번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2.1 불경 번역 활동(2세기~9세기)

  최초의 번역 붐은 한대에서 수·당·송대에 걸친 약 800년간 지속된 불경 번역이다. 4대 번역가(四大譯家)로 불리는 번역자가 유명하다. 이 사대 번역가란 구마라집(鳩摩羅什, 350~409), 진제(眞諦, 499~569), 현장(玄奘, 602~664), 불공(不空, 706~774)을 이르는데, 이 가운데 현장만이 중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나머지 모두는 외국인 승려다. 불경 번역에 종사한 인원을 보면 한대 말기부터 당 무종(武宗)의 폐불(廢佛)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번역에 종사한 번역자는 외국인 승려가 압도적으로 다수를 점하여, 본국 승려는 후기가 돼서부터 서서히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8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불경 번역은 외부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콩후이이(2000)는 “국내의 지식 계급은 번역 활동을 자국 문화의 주류로 삼으려 하지 않아서, 번역은 내내 주변적 작업으로 간주되어 지식인이 종사하는 활동이 아니었고, 당시 중국에서는 아직 유교 세력이 압도적이었던 것도 자국 번역가의 출현을 저해하는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불경 번역의 경우 외국인 승려가 범어(산스크리트어)를 한문-이 글에서는 편의상 중국어 어문을 ‘한문’으로 통칭할 것이다-으로 구술 번역(현재 cite translation이라고 하는 통역 방법과 같음) 한 것을 중국인 승려가 받아쓰는 방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외국인에 의한 구술 번역과 자국인에 의한 필기’ 형식은 이후에도 하나의 번역 형식으로 계승된다.

2.2 기독교 선교사에 의한 번역 활동(16세기~17세기)

  송대부터 이 시기에 이르는 오랜 번역 활동의 공백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의한 외래 정권(원 왕조)에 의해 왕조가 교체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원대에 들어서자 넓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족이 외교의 주도권을 잡고 동서 교역을 주도했다. 이후 한족의 반란에 의해 명 왕조가 들어섰다. 수백 년간 외국과의 접촉이 끊겨서 외국어를 해득한 인재가 국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오랜 공백을 겪고 찾아온 제2차 번역 붐은 명대에 시작한다. 예수회는 중국어를 아는 선교사를 파견하여 중국과의 융화를 꾀하였다. 선교사는 경건한 교도이자 다양한 학문에 뛰어난 전문가이기도 했다. 중국(명조)에 파견된 선교사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 선교의 선구자(開敎之祖)로 불리는데, 교리서와 과학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한문 저술이 있다. 명말의 저명한 과학서 『기하 원본(幾何原本)』은 마테오 리치의 구술 번역을 조정 학자인 쉬광치(徐光啓)가 기록한 것이다.

  불경 번역의 경우 소수이지만 자국인 번역승이 있어서 현장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자도 있었으나, 예수회에 의한 번역 활동은 완전히 외국인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한문과 중국 문화 습득에 노력한 까닭이다. 그들은 중국어를 말하고, 중국의 의복을 입었으며, 조정의 예법을 따랐다. 특히 마테오 리치는 스스로 유학(儒學)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사대부 계급의 환심을 사, 서구의 자연 과학을 전하는 것으로 조정 내부로 진입하고 있다. 당시 선교사 중에는 중국어 사전이나 문법서를 쓴 자도 있었다.

  이 시기의 번역도 불경과 마찬가지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구술 번역을 중국인이 받아쓰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번역서를 출판할 때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구술한 것을 중국인 번역자-외국어를 알지 못하지만 편의상 ‘번역자’로 부르도록 하겠다-가 받아쓰고, 나아가 자연스러운 한문으로 편집 · 윤문하여 번역문을 완성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이후 이른바 “전례 논쟁(典禮論爭)”이 일어나 선교사에 의한 번역 활동도 쇠퇴하게 된다.

2.3 아편전쟁 이후 “서학” 번역 활동

  아편전쟁(1840~1842)에 의해 식민지와 봉건 사회가 서로 이웃하는 상황에 빠진 청조에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났다. 국가 체제는 무너뜨리지 않고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서양의 기술과 학문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 제창되었다. 이 시기에 번역자는 분명히 번역을 사회 변혁의 무기로서 인식하여 명확한 의지로 정보의 취사선택과 문체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상 간단하게 중국의 3차에 걸친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번역은 청조 말기 이전에 주로 외부 세력(승려,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번역자, 즉 2개 언어를 해득하고 모국어로 번역을 하는 번역자의 출현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학 번역 활동 시기에서야 나타나게 된다. 양무운동과 번역에 관해서는 뒤에 상술하고자 한다.


Ⅲ. 청대 언어 환경

3.1 청조(1644~1912)의 성립

  1616년 여진족의 한 갈래인 만주족에서 누르하치라는 영웅이 나타나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조의 지배로부터 독립, 민족 독자의 문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 이자성(李自成)의 난에 의해 무너진 명조의 혼란을 틈타 1644년 만주족은 적군인 이자성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 자금성에 들어가 정권을 탈취하였다. 만주족의 통치는 계급 격차의 시정, 감세, 농지 확대, 주변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간의 평화 공존의 실현, 티베트, 위구르, 몽골, 타이완 지역의 통일 등, 국력의 충실과 영토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고, 강희(康熙) · 옹정(雍正) · 건륭(乾隆) 시대에 역사상 가장 번영한 사회를 구축하였다. 청은 중국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한 국가였다. 현대 중국이 주장하는 영토도 청의 최전성기에 실현한 범위를 그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신해혁명에서 쑨원(孫文)이 주장한 ‘오족협화(五族共和)’ 즉 한족 · 만주족 · 몽골족 · 장족(티베트) · 강족(위구르) 간의 공화 논리도 청에서 유래한 확대된 판도에 의거한 것이다. 민족 정책의 측면에서 보면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관습인 변발이나 의복의 강제 이외에는 한족과 만주족 간의 차별을 두지 않고 적극적인 융화정책을 펼쳤다.

3.2 청조의 공용어와 번역

  청조를 세운 만주족은 원래 여진족의 일파이다. 그들이 말하는 여진어는 원래 문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구어는 여진어로, 문어는 몽골어로 쓰는 관습이 16세기 말까지 이어졌으나,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가 국내 학자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기초로 만주 문자를 만들어 여진 문화의 유지와 발전에 힘썼다. 이에 의해 후금 시대에 한문 전적을 대량으로 번역하여 한족의 문화, 특히 봉건 왕조의 통치 기술에 관해 학습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한족을 대신해 광대한 중국을 통치하게 된 만주족에게 기본적 치세의 방책을 제공하게 된다.

  『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청조에는 “필첩식(筆帖式)”이라고 하는 관원이 있어서, 조정 내의 번역 · 통역 ·상주문서 작성에 종사하고 있었다. 필첩식에는 만주족, 한족, 몽골족 이상 세 민족이 있었고, 주로 국내에서 사용되던 공용 언어 간 번역을 담당하였다. 청조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서 각 민족의 언어를 존중했기 때문에 관영 학교에서 만 · 한 · 몽의 언어를 교육하고 필첩식을 통역관으로 등용하였다. 청조의 주요 번역 담당 부서는 아래와 같다.

1) 내각몽고방(內閣蒙古房): 몽골, 이슬람, 티베트 각 민족을 위한 공문서의 번역 담당.

2) 내각한본방(內閣漢本房): 한문 서적 가운데 만문(滿文) 번역서가 없는 것을 번역.

3) 이번원(理藩院) 몽고번역방: 몽골문으로의 번역을 담당.

4) 내각실록관(內閣實錄館): 역사 사실을 한 · 만 · 몽문으로 기록. 한문본을 정본으로 삼고 이를 만 · 몽문으로 번역.

5) 내번서방(內飜書房): 상술한 종류 이외의 문서나 서적을 한문에서 만문(滿文)으로 번역.

  청조에서 한문을 만문으로 번역한 대상은 황제의 칙유(勅諭) 등 공문서 이외에 사서오경, 사서, 사대기서(四大奇書), 시(詩) · 사(詞) · 곡(曲) 등의 고전 문학 등 각종 서적을 망라하고 있다. 『만주 실록(滿洲實錄)』에는 한문과 만문 이외에 몽골어도 병기되어 관찬과 사찬 사서(辭書) 역시 다수 제작되고 있다. 번역은 원칙적으로 상술한 한문, 만문, 몽골문 간에 진행되었으나, 자금성 내의 편액에는 티베트어와 위구르어까지도 보인다. 청조는 상술하였듯 민족 융화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청조 최초의 황제인 순치제(世祖, 재위 1643~1661)는 한족 문화를 좋아하여 중국 고전과 문학 서적을 즐기는 등 중국 문명에 심취하였고, 2대 강희제(聖祖, 재위 1661~1722) 역시 사서오경에 정통하는 등 만주족의 민족 문화는 서서히 한족 문화에 잠식되어 갔다. 그리고 만주족 독자 문화와 언어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어, 만문은 현재 사용자가 거의 없어져 사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청조에서 사용한 한문이 이후 중국에서 공통어로서의 지위를 지켜, 민족 통일에 공헌하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Ⅳ. 외국인 주도의 번역과 통역

4.1 조공 외교와 번역 · 통역

  외국과의 외교에서는 1875년 영국에 주재 대사를 파견할 때까지 청조는 명조의 외교정책에 따라 주위 국가들이 중국의 덕을 흠모하여 공물을 바치기 위해 방문하면, 중국 황제가 그 보답으로 은사를 베푸는 이른바 ‘조공 외교’의 자세를 견지해 왔다. 청과 조공 관계에 있던 국가는 베트남, 미얀마, 타이, 조선 등 주변 국가로 한정되어 있었다. 사서에 기재된 ‘외교 사절’은 왕왕 조공을 통해 청조에 들어가지만 통상의 편의를 얻기 위한 무역 목적의 방문단이기도 해서, 청조는 풍부한 중국의 물자를 주변 제국에게 나누어 주는 형식의 외교와 무역을 실시하였다. 확실히 영국과의 무역에서 청조가 영국에서 수입하고 싶었던 물자는 거의 없었는데, 오랜 기간에 걸친 청조의 대폭적인 수출 초과 상태가 지속되어 영국에서 대량의 은이 청조에 유입되었던 것이 아편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조공 형식의 외교에서 자국의 번역 및 통역관을 갖고 있지 않았던 청은 서구 국가와의 교섭을 조정 내에 관직을 얻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조정의 이번원에 정식 통역관으로 채용된 선교사도 있다. ‘화이질서(華夷秩序)’의 가치관을 지닌 조정에서 보면 선교사들을 충실한 하인으로서 조정에 시중을 드는 사람들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국내의 통치에서만이 아니라 대외 외교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임을 알아채는데 너무 늦었던 것이 청조의 실책임이 드러나게 된다. 선교사에 의한 외교에서의 번역 및 통역의 문제점이 점차 커가자, 청조의 학자와 지식인은 자국민에게 서구 언어의 교육을 펼칠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 이후 마침내 외교 통역관 육성을 위한 어학 학교가 개설되었다.

4.2 관영 어학 학교의 창설

  1862년 설립된 동문관(同文館)이 청 최초의 관영 외국어 학교다. 1644년 청의 성립 이래 218년의 역사가 흘러 1912년에 청조가 멸망하기까지 겨우 50년을 남겨둔 때였다. 이후 상하이 광방언관(廣方言館), 광저우 동문관(廣州同文館)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1870년대부터 정궈판(曾國藩, 1811~1872), 리홍창(李鴻章, 1823~1901) 등의 건의에 따라 유학생이 해외에 파견되기에 이른다. 유학 지역은 주로 미국, 유럽 등지였다. 리난추(黎難秋)의 중국 구역사(中國口譯史)(2000: 77~109)의 데이터에 의하면 미국에는 1872년~1875년까지 매년 30명씩 10세~15세의 소년이 보내졌고, 유럽에는 1870년~1880년대까지 88명, 일본으로의 유학은 1896년(청일전쟁 이듬해)부터 시작하여 1905년(러일전쟁 당시)에는 8,000명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일본으로의 유학 목적은 일본인이 흡수한 ‘서학(西學)’의 습득이었다. 유학생은 귀국 후에 외교 방면에서 활약하는 것 이외에, 그때까지 조정이 돌보지 않았던 외국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적극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사회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관영 어학교 출신자는 졸업 또는 유학에서 귀국한 이후 국내외 외교를 담당하는 요직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미 서구 열강에 의한 침략으로 약화된 청은 멸망에 이르는 최후의 10년, 즉 20세기 초까지 외교 통역과 번역의 장에서 선교사 등 외국인 통역관을 완전히 추방할 수는 없었다.


Ⅴ. 선교사의 역할

5.1 러시아와의 외교 교섭

  선교사가 외교 통역의 무대에 나타나 눈에 띄는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러시아와의 교섭에서였다. 당시 조공 이외의 외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청에 대하여 러시아는 유일하게 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희망하였다. 러시아 대표가 1660년 초에 청 조정을 방문한 당시, 순치제로부터 받은 서한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인재가 없었고, 그 서한은 15년 후에야 당시 청에 머물고 있던 페르비스트(南懐仁, Ferdinand Verbiest, 1623~1688) 등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 무렵 1675년에 러시아는 그리스어, 라틴어, 루마니아어에 능통한 니콜라이(Николае Гаврилович Милеску, Nikolai Spathari, 1636~1708)를 외교사절로 청조로 보냈다. 통역을 맡았던 것은 페르비스트였다. 이 당시 니콜라이가 궤배(跪拜,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는 배례)의 예를 거절한 까닭에 황제 알현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페르비스트는 유럽 선교사가 러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넘어올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사적으로 니콜라이에게 말을 걸어 통역 신분임에도 청국의 지도와 정치 및 경제 상황, 나아가 군사에 이르는 다양한 기밀 문서를 몰래 니콜라이에게 제공하였다. 니콜라이는 황제와의 공식 회견은 이룰 수 없었으나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도 니콜라이는 청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청에 들어와 궤배의 예를 거절하는 것을 빌미로 삼아 체재 기간을 늘려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외국인 선교사 통역과 러시아 사절의 결탁 그리고 통역에 의한 국가 기밀의 누설이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니콜라이는 러시아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귀국 후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중국만기(中國漫記)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외국인이 쓴 최초의 상세한 중국 소개서였다. 페르비스트는 이후에도 니콜라이와 연락을 지속하여 1688년 마침내 예수회에서 파견한 6명의 유럽 선교사가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마카오에 대한 특권 취득 역시 페르비스트의 노력과 관계가 없지 않다.

5.2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외교 교섭

  청 조정에는 유럽 국가들의 언어에 관한 자국의 번역 및 통역 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과의 외교 교섭 시에는 선교사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강희제 시대에 조정에서 외교 통역이나 번역 분야에서 활약한 선교사로는 전술한 페르비스트 이외에 페레이라(徐日昇, Thomas Pereira, 1672~1708), 제르비용(張誠, Jean Franucois Gerbillon, 1654~1707), 부베(白晋, 白進, Joachim Bouvet, 1656~1730) 등이 있다. 이러한 통역과 번역을 맡은 선교사들은 청조에 많은 과학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여 조정의 중용을 받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 진정한 목적은 종교적 세력 확대에 있었다. 때문에 페르비스트만이 아니라 선교사들은 우선 중국어를 익히고, 조정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당시 황제가 특히 흥미를 품고 있던 서구의 기술과 학문 연구에 힘써, 이 지식을 조정 내에서 강의하고 전문 서적을 번역하기 위해 조정에 등용되었다. 나아가 외교 통역을 통하여 서구에 청국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환언하면 자신들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번역과 통역 활동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선교사들은 자신의 모국에게도 청에 관한 다양한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이들은 청에게 서구를 소개한 것만이 아니라, 서구에게도 청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5.3 유럽 열강의 침략과 선교사가 맡은 역할

  아편전쟁을 계기로 유럽 열강과 일본이 청에 대한 무력 침략을 개시하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각지에 조계를 건설하기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선교사는 번역과 통역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당시 청에는 서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국인 번역자나 통역자가 없었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구 국가들도 전문 외교 통역관을 육성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는 ‘중국통’으로서 그 임무에 적격이었다. 이들은 유럽 국가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의로 오역하거나, 조약 문구를 조작하거나. 청의 군사 정보를 적극적으로 누설하기도 하였다. 자국의 번역자 및 통역자가 없던 까닭에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된 사실을 청 조정이 알아차렸을 때에는 늦은 상황이어서 이미 국내에 다수의 조계가 건설되어 있었다.

5.4 선교사에 의한 학술 번역

  청 조정에서 일한 선교사는 원래 정확한 역법을 만들기 위해 고용된 천문학 전문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페르비스트와 마찬가지로, 명 · 청 2대에 걸쳐 중국 조정에서 일한 천문학자로 아담 샬(湯若望,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이 있다. 아담 샬은 1630년 쉬광치((徐光啟, 1562~1633)의 부름에 응하여 페르비스트와 함께 베이징으로 와, 유럽 기하학에 의한 계산법으로 명의 역법을 수정하고 5년 후에 중국과 서양의 역법을 조화시킨 『숭정 역서(崇禎曆書)』를 완성하였다. 이 외에 ‘서학’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 번역에 종사한 선교사로 존 프라이어(傅蘭雅, John Fryer,1839~1928), 티모시 리처드(李提摩太, Timothy Richard, 1845~1919), 존 영(林楽知, J.Allen Young, 1836~1907), 마틴(丁韙良, W.A.P. Martin, 1827~1916) 등이 있다. 이들 선교사에 의한 번역 서적은 당시 지식인에게 다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선교사가 번역한 주요 문헌을 중국 번역 간사(中國飜譯簡史)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조의 마테오 리치가 번역한 주요 문헌은 『기하 원본』, 『대측(大測)』(삼각법), 『할도팔선표(割圖八線表)』(삼각함수), 측량법의(測量法義)(측량기술)가 있다. 번역은 마테오 리치가 구술하면 쉬광치나 리즈자오(李之藻, 1565~1630) 등 중국 학자가 받아 적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이처럼 서구의 진보된 자연과학 지식과 과거부터 중국에서 독자적 발전을 해온 학문이 융합하여, 중국 자연과학은 큰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

  청조에서 번역된 대표적 자연과학 서적으로 일부를 들어보면 수학 분야에서는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 원리(歐幾里得和阿基米德幾何原理)』, 『산술찬요총강(算術纂要總綱)』, 『차근 방법 절요(借根方法節要)』, 『구고상구지법(勾股相求之法)』, 『팔선표근(八線表根)』, 『비례 규해(比例規解)』, 대수표(對數表) 등이 있고, 역학 분야에서는 『태서 수법(泰西水法)』, 『기기 도설(奇器圖說)』, 지리 분야에서는 『곤여 만국 전도』, 야금 및 광업 분야에서는 『곤여 격치(坤輿格致)』, 군사 기술에서는 화공계요火攻契要, 의학 및 생리학 분야에는 『태서인신설개(泰西人身說概)』, 생물학 분야에는 사자설(獅子說), 『진정응설(進呈鷹說)』 등이 있다. 모두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학자가 협력하여 번역한 것이다.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내에 설치된 번역관(飜譯館)에서는 선교사의 구술 번역을 중국인이 문자화하는 형태로 작업하였다. 존 프라이어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번역 방법을 썼던 듯하다.

“번역할 때에는 우선 서양인이 원서를 숙독(熟讀)하여 내용을 잘 이해한 뒤 중국인과 상의하여 함께 번역하던지, 서양인이 축어적(逐語的)으로 구술로 번역한 것을 중국인이 받아쓰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했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중국인과 어떻게 하면 내용을 풀어낼 수 있을지 숙고하였다. 중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였다. 번역이 끝나면 중국인이 초고를 퇴고 · 윤문하여 자연스러운 중국 문장으로 만들었다.”

  선교사와 중국인의 협력으로 번역된 서책에는 “利瑪竇口授,徐光啓筆受”, “湯若望口述,焦勗撰”, “艾儒略口述、瞿式穀筆受”의 예에서 보이듯 ‘외국인 이름, 중국인 이름’의 형태로 쓰여 있고, 외국인 이름 뒤에는 ‘구술’이나 ‘구수(口授)’, 중국인 이름 뒤에는 ‘찬, 필수(筆受), 정(訂)’ 등으로 그들이 맡은 바를 명확히 하고 있다. 때로는 ‘〇〇주석(注釋)’이란 문자가 더해지기도 했다. 현재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받아쓴 사람을 번역자로 인정할 수 없지만, 중국에서는 번역에 참여한 중국인 사대부 역시 번역을 구술한 외국인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번역자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는 번역 소설로 청을 대표하는 번역자로 알려진 린수(林紓, 1852~1924)의 예와도 부합한다.

5.5 강남제조총국의 번역사업

  청조 말기 학술 번역 분야에서 특히 큰 역할을 맡았던 기관이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이다. 강남제조총국은 1865년 리홍창의 상주(上奏)에 의해 개설을 비준받고 1868년 6월에 번역관(飜譯館)이 정식 개설되었다. 여기서 번역 구술을 맡았던 인물이 프라이어, 존 영, 칼 크레이어(金楷理, Carl Traugott Kreyer, 1839~1914) 등이었다. 필기 번역자로는 화뤄딩(華若丁), 쉬쉬에린(徐雪林) 등이 있었다. 번역서의 출판도 강남제조총국 내에 설치된 인쇄소에서 하였다. 중요한 서적의 경우에는 간행 전에 서양인과 중국인이 공동으로 최종 교정을 했지만, 일반적인 서적의 경우에는 최종 번역문은 모두 중국인이 도맡아서 했다. 이 당시 이미 프라이어에 의해 다음과 같이 과학기술 관련 전문 용어에 대한 번역 기준이 세워져 있었다.

1) 이미 중국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사용한다. 이를 위해 원래 중국어로 저술된 기술서 및 이전에 번역된 서적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나 번역어를 조사하여 사용한다. 
2)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 경우, ①새로운 한자를 만드는 방법: 예컨대 금속이나 광물에 관해서는 원어의 발음과 유사한 음을 가진 기본적 한자에다 금(金)이나 석(石)의 편방을 더한다.(마그네슘을 鎂, 실리콘을 矽) 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이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가한다. ②두 문자 이상으로 설명적인 번역어를 만든다.(산소를 양기(氧氣), 청우계(晴雨計))를 풍우표(풍우표(風雨表)) ③음역 한다. 원어의 발음을 모방하여 한자로 표기한다. 이때 중국어의 발음에 따른다.

  이러한 용어는 매번 원어와 번역어를 대조하여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강남제조총국에서 번역한 서적은 공학, 지학(地學), 음성학, 수리학, 화학, 의학, 농학 등의 자연과학 분야의 기초 이론서가 대부분이었다. 최종 교정은 이러한 학문에 정통한 중국인 지식인이 담당하였다.

5.6 선교사에 의한 문학 번역

  황제나 조정 사대부의 흥미가 서구의 과학기술과 실학 흡수에 있었던 까닭에 선교사들은 문학 번역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명대에 마테오 리치가 이솝 우화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와 그의 저작 속에 이솝의 언행과 우화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음은 알려져 있다. 이후 이솝 우화는 판토하(龐廸我, Didace de Pantoja, 1571~1618)의 칠극(七克)(1614) 및 트리고(金尼閣, Nicolas Trigault, 1577~1628)의 황의(況義)에 소개되었다.

  청대에 들어온 프라이어는 소설에 의한 사회 악습 개선을 제창하여 이후 량치차오 등의 신소설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또 티모시 리처드가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上海, 美華書館, 1895)로 번역한 역사서 The Nineteenth Century: A History(Robert Mackenzie(馬懇西) 저술, 1880)와 『회두간기략(回頭看記记略)』(1894)으로 번역한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1850~1898)의 소설 Looking Backward 2000~1887(1888)는 당시 민족 존망이라는 상황에서 지식인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5.7 선교사의 번역론

  현존하는 선교사의 번역관에 대한 자료로는 포와로(賀清泰, Louis de Poirot, 1735~1814)의 성서에 대한 의견이 있다.

“『성서』 번역을 하는 사람은 경건, 성실, 신중함을 제일로 여겨서 어디까지나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국가의 언어 습관에 맞추는 것이 아닌, 완전히 『성서』의 문의(文意)에 따라야 한다. 예부터 성서 번역은 이와 같이 해왔으며, 나 역시 또한 선례를 따랐다. 중요한 것은 도리(道理)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아름다운 문장이 사람에게 진실한 선(善)을 주는 것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포와로는 나아가 성서에는 두 종류의 독자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문장의 이해하기 쉬움이나 읽기 쉬움과 상관없이 성서의 도리를 궁구 하고자 하는 독자와, 소일거리 삼아 성서를 읽거나 번역문의 표현과 번지르르함에 관심을 갖는 독자가 있다. 후자는 저 번역문에 찬성할 수 없겠으나, 성서는 신이 많은 몽매한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하기 위한 것임으로, 번역자는 원문에 따라 하나하나 모두 맞춰야 할 뿐만 아니라 늘이거나 줄인다거나 또는 말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Ⅵ. 청의 번역론

6.1 청조 최고(最古)의 번역론 번청설(繙清説)

  현존하는 중국인에 의한 청대에 가장 오래된 번역론으로, 조정에서 한문과 만주어 번역 및 번역 교육을 맡았던 웨이샹첸(魏象乾)의 번청설(繙淸說)이 있다. 번청설은 건륭 5년(1740)에 부내(府內)의 문서로 쓰인 번역론으로, 신인 번역관의 교육용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번청”이란 한문을 만문으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문은 청조의 공문서에 사용되었으나, 한족이 가진 선진적 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한문 번역은 조정 내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웨이샹첸은 자신의 번역 경험을 토대로 번역의 원칙, 기준, 신인 번역자의 마음 자세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올바른 번역이란 원문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원문의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늘이거나 줄이지 않으며, 전후 순서를 바꾸지 않으며, 내용을 취하는 것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중략> 때로 내용의 증감이나 전후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해도, 거기에는 근거가 없으면 안 된다. 늘인다고 하는 것은 한문 자체에 함축이 있음을 의미하니, 늘이지 않고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이다. 줄인다는 것은 한문에 중복이 있는 경우이니, 줄이지 않으면 말이 간결하게 되지 않는 경우이다. 앞뒤를 바꿈으로써 의미를 취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통하도록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청문(淸文, 만문)의 형식과 전연 맞지 않을 경우에는 원문을 바꾼다. <중략> 청문에 조금 자신 있는 번역자는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 번역문을 이리저리 매만지거나,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딱딱하게 생각해서 의역하기 쉽다. 또 어순에 따른 번역이 졸렬하다 느껴서 줄줄이 바꾸려 한다. 상투어나 관용적 표현을 원문이 마치 그러한 것처럼 속여서 사용하여, 그것이 한문의 본의에 맞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더욱이 어휘나 표현이 막히면 늘이거나 줄이고는, 청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란 변명을 하는 경향이 있다.”

6.2 「채서학의(採西學議)」 

  펑구이펀(馮桂芬, 1809~1874)은 교반려항의(校頒廬抗議)』(1861) 전 40 책 가운데 「채서학의(採西學議)」 편에서 중국의 번역 및 통역자 육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구의 종교 서적 등은 취할 것이 없으나 수학, 물리학, 화학 등 자연과학은 우리나라를 한참 앞선 수준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 이러한 학식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또 세간에서 외국인의 언어를 익혀 통사(通事)라 칭하고 있는 무리가 있는데, 어느 모로 보나 의식(衣食)이 충분하지 않은 자들이 그 직업에 나서고 있어, 질이 낮고 지식이 천박하며 품격이 모자라, 금전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번이(蕃夷)의 말을 어떻게든 떠듬떠듬 하지만 상품의 명칭과 수량을 적어내는 정도밖에 안 된다. 그들에게 학문 따위는 바랄 수도 없다. 향후에는 마땅히 외국어 학교를 세워서 특히 우수한 아이들을 모아 교육해야만 한다. 서양인은 우리의 언어 · 문화 · 민속 등을 열심히 배워왔으나, 우리는 서양인을 통해서만 외국에 대해 알 수 있다. 언제까지 교양 없는 통사에게 의지해야 하겠는가. 번역 · 통역은 ‘천하의 제일가는 정치의 요체’이다. 외국에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뛰어난 학문이 많을 것이다. 이를 우리가 번역하여 중화민족의 영지(英知)로 삼는다면, 서양인을 반드시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으나 남색보다 푸르듯.”

  이 주장은 그대로 양무운동에서 비롯한 “중체서용(中體西用)” 슬로건으로 이어진다.


Ⅶ. 양무운동과 번역 · 통역

7.1 양무파의 주장

  1862년 베이징에 설립된 경사 동문관(京師同文館)은 양무파인 공친왕 혁흔(奕訢, 1833~1898)의 상주에 의해 설립된 외국어 교습소인데, 혁흔은 상주 문에서 “외국의 정세를 알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정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어를 알게 되면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외국은 중국어 학습을 위해 자금을 할애하여 중국인을 고용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외국어에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지 못했습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양무파의 대표적 인물인 리홍창(李鴻章, 1823~1901)은 이듬해인 동치 2년(1863) 상하이에 외국어 학교를 설립할 것을 상주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국인이 서양인과 교섭할 때에 자신의 의사나 요구를 전해야만 하는데, 상대의 허실(虛實)이나 성의(誠意) 유무도 파악하지 못한다면 대등하게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은 중국어를 학습한 자가 많고, 우수한 자는 우리의 고전과 역사에도 능통하여 공문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인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관리나 명사 가운데 외국어를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외국은 상하이에 번역관과 통역관 2명을 두어, 외교상 접견에는 항상 외국인에게 통역을 맡기고 있으나, 이것이 치우침이나 날조의 우려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외국어를 이해하는 자라고 해봐야 통사(通事)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군사 교섭에서는 통사를 고용하여 통역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사는 양무에 커다란 해악이 됩니다.”

  리홍창은 통사에 대해 “외국인 세력을 등에 엎고 동포를 깔보며,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일할 뿐이다. 더구나 외국어로 말은 할 수 있으나, 열 명 가운데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이 당시 민간의 중국인 통사는 외국인의 앞잡이로 여겨진 듯하다.

  장즈동(張之洞, 1837~1909)은 1898년 간행된 『권학 편(勸學篇)』에서 역시 당시 통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통사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며 학술에 정통한 번역자를 교육하는 것이 급무라고 적고 있다.

“각 성에 설치된 학관(學館)에서 서양인 교사가 교편을 잡고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교사와 학생 간에 통역을 위해 통사를 들여보내야만 하는데, 통역하는 자는 외국어만 알 뿐이지 학문에는 정통하지 않은 까닭에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부분은 멋대로 생략하거나 쉬운 말로 바꿔버린다.”

  아편전쟁(1840~1842)에 의해 식민지와 봉건사회가 병존하는 상황에서 양무운동이 일어났다. 양무운동은 국가 체제 자체는 유지하면서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 제창되었다.

7.2 동문관의 어학 교육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청의 외교는 일관되게 야만적이고 낙후된 미개 국가들이 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후 영국과의 사이에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고 조계 건설을 허락한 중국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1860년에 일찌감치 공사(公使)를 파견하였다. 청이 자국 공사를 영국에 주재시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5년이 되어서였다. 이는 영국에 파견할 만한 외교 지식과 영어 실력을 겸비한 수행 번역관이 청조에 없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정식 번역 및 통역 업무를 외국인에게 맡기거나, 또는 외국인이 있는 곳에 출입하며 떠듬떠듬 외국어를 귀로 익힌 자국 민간인에게 잡다한 통역을 시키던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들의 상주로 1862년 설립된 것이 동문관(同文館)이다.

  동문관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외국어 학교였다. 동문관은 설립 당시 많은 외국인 교사를 고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교수진의 국적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이었다. 1898년까지 고용한 각 언어의 교원수를 보면 가장 적은 경우는 1명(스기이 구타로(杉幾太郎))의 일본이었고, 가장 많은 경우는 12명의 영국이었다. 동문관은 처음에는 정식 규정이 없어서 우수한 학생이라면 언제든지 입학시켜 적당한 때에 유학과 실습 등으로 국내외에 파견하였다. 이후 1876년에 8년간의 정식 교육 과정을 정하게 되었다.

  입학 연령이나 조건은 따로 정하지 않았으나, 거의 12세~15세의 우수하고 가문이 나쁘지 않은 자제를 모집하였다고 한다. 처음 수년간은 중국어와 외국어 및 외국의 역사와 지리 등을 배우고, 후반 수년간은 각각의 전문 과학 지식을 배우는 교육 과정이다. 학생은 2학년부터 번역 및 통역 연습을 시작한다. 2학년은 메모 정도의 번역부터 배우기 시작해, 3학년은 문장, 4학년은 공문서, 5학년 이상은 서적 번역을 배운다. 상급생은 또한 학교에서 정부의 외교 분야로 파견되어 번역과 통역 실습을 했다.

  네덜란드 통사(通詞)나 당통사(唐通事) 등을 막부의 하급 관리로 고용하여 나가사키(長崎)에서 세습에 의한 통역 교육을 전통적으로 지속해온 일본과는 달리, 청에서는 1860년대에 들어서야 번역과 통역 교육을 시작했다. 상술한 동문관 이외에도 상하이의 광방언관(廣方言館, 1869), 광저우(廣州) 동문관(1864), 후베이 자강 학당(湖北自强學堂, 1893), 경사 역학관(京師譯學館, 1903) 등, 각국 언어를 가르치는 종합 외국어 학교가 각지에 설립되었다. 이외에 훈춘 러시아어관(琿春俄語館), 신장 러시아어관(新疆俄語館), 타이완 서학관(臺灣西學館, 영어 학교), 동문 학당(東文學堂, 일본어)은 언어별로 설치되었던 외국어 전문학교였다. 이렇게 1860년대부터 급격하게 외국어 교육이 성행하게 되어 외국어에 정통한 자국인 번역자라는, 근현대적 의미의 번역자에 해당하는 인재가 탄생할 기반이 갖추어져 갔다. 이러한 교육기관에서 배우고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번역 현장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독자적 번역론을 전개하게 되는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7.3 량치차오의 번역론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청대 학술 개론(淸代學術槪論)』에서 청조 말기의 사상사와 번역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유신 변법(維新變法)”을 주장하여 1898년 광서제가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태후와 결탁하고 있던 이홍창 일파도 은근히 이를 지지하였다. 바로 이 당시의 유행어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다. 장즈동(張之洞, 1837~1909)은 바로 이 중체서용을 자주 말하던 인물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인은 기계 제조와 제어, 군사 훈련 이외의 학문이 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번역된 서양 서적을 보더라도 실용적인 기술 이외의 학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캉유웨이(康有為, 1858~1927), 탄스통(譚嗣同, 1865~1898)은 이러한 ‘학문적 기아(飢餓)’ 상황에서 사색을 거듭했다. 량치차오는 나아가 옌푸(嚴復, 1854~1921)와 린수(林紓, 1852~1924)의 번역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옌푸의 번역서 천연론(天演論)(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은 결코 새로운 책은 아니지만 서양 유학생으로 본국의 사상계에 영향을 준 것은 옌푸가 최초이다”, “린수가 번역한 소설은 거의 구미의 이류나 삼류 작가의 것이지만 매우 유행하였다.”

  이 시기가 되자 량치차오 등은 양무파와 선교사의 번역에만 의존하는 상황을 옳게 여기지 않고, 번역을 통해 동시대 학문을 적극적으로 해외에서 도입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이른바 일본어로 번역된 구미의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중역(重譯)”이 성행하고 번역자의 육성과 번역가 협회 설립에 관한 글이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Ⅷ. 청말 학술 번역

  청조 말엽에 이르면 각지의 외국어 학교나 조정에서 해외로 파견한 유학생이 귀국하여 국내에 많은 서적을 번역 · 소개하기 시작한다. 현대적 번역자의 정의에 걸맞게 “2개 언어를 알고 모국어로 번역하는” 번역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까지 전통적인 번역에서는 중국 지식인은 구술된 번역 내용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 흡수하여, 중국 문화에 부합하는 형식으로 각색하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 번역 대상이 된 서적 역시 거의 자연과학과 관련한 것이었는데, 이 시기가 되면 귀국 유학생들이 점차 사회과학과 문화 관련 학문 분야의 번역서를 출판하게 되었다.

8.1 옌용징(颜永京, 1839~1898)

  옌용징은 귀국 유학생으로 처음 번역서를 출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54년 미국에 유학하여 1861년 현지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862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번역과 교육에 종사했는데, 1878년부터는 상하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1889년에 조셉 헤이븐(Joseph Haven, 1816~1874)의 Mental Philosophy심령학(心靈學)이란 서명으로 출판하였다. 원본은 전체 3권이지만 번역한 것은 서언과 제1권뿐이어서 완전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 책을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가 같은 시기에 심리학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고 있다.

8.2 옌푸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천연론(天演論)』으로 번역하면서 그 서문에서 번역의 기준으로 “신달아(信達雅)”를 주장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번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인해 옌푸 자신이 말한 ‘충실함(信)’을 크게 배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번역은 원저에 충실하게 번역된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과 평론을 더하고, 개서(改書)와 번역자의 의견이 반영된 많은 주석이 삽입된 것이었다. 옌푸는 헉슬리가 ‘진화’와 ‘윤리’를 일종의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을 옳다고 보지 않아서, 그 부분은 번역하고 있지 않다. 루쉰(魯迅, 1881~1936)은 후일 이 번역서에 대해 ‘조작된 것’이라 평했다. 번역서 전체의 1/3을 점하는 주석에서 옌푸는 다윈의 종의 기원, 허버트 스펜서의 종합 철학 체계, 맬서스의 인구론은 물론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의 학설에 더해 아담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과 데카르트,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 라플라스 등의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스펜서 등의 인물이 천문학의 원리로써 사회와 정치 문제의 해석에 사용한 관점에 끌렸던 것이 옌푸가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잠재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역 또는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번역 방식은 당시 중국 사회에 대한 뼈저린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8.3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 많은 서양 문화를 흡수하여 근대 국가로의 변화를 이룬 모습은 중국 지식인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들이 중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유신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추진한 이른바 ‘유신파’는 번역을 매우 중시하여 많은 서적을 번역했다.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은 서양 서적을 직접 번역하는 것보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중역(重譯)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본은 유신 이래, 많은 유익한 서적을 번역하여 그 수가 수천 책을 넘어선다. 정치학, 경제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같은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서구의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5년, 6년도 걸리지만 일본어는 몇 개월 만에 읽을 수 있게 된다.” 즉 술어(術語)의 번역 등에 고민하지 않고 일본어 번역서에 사용된 한자어를 그대로 차용하면 서양의 학문을 더욱 빨리 효율적으로 도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어 번역본의 중역이 대량으로 이루어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한자어로 번역한 사회과학 분야의 술어와 전문 용어가 현재도 그대로 중국어 속에서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Ⅸ. 결어

  이상 약 300년에 걸친 청대 번역 및 통역의 역사를 개관해 보았다. 국가가 번역과 통역에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 그리고 타문화와 타언어를 존중하는 자세 유무에 의해 번역과 통역의 존재 양식이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대에는 외래 민족에 의한 통치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만문 · 한문 · 몽고문에 의한 번역이 시행되어, 조정 내의 번역 조직 역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의 통일과 안정에 필수적 요소로서, 청의 오랜 역사 속에 끊임없이 유지되어왔다. 이러한 번역은 모두 체제 내적 활동이었으나 베이징 관화(北京官話) 제정과 함께 민족의 융화에 큰 공헌을 하여, 강희 · 옹정 · 건륭 3대에 걸쳐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중국에 들어왔으나 선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임과 동시에, 서양의 학자로서 자연과학과 기계기술 등의 실학 분야에서의 번역 활동으로 청국에 공헌함으로써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청은 선교사들의 번역을 통해 새로운 학문에 눈뜰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고국과 종교에 대한 충성심에서 번역 및 통역 활동을 한 까닭에 열강의 청조 침략을 이끌기도 했다.

  전통적인 화이 질서 사상에 의해 주변국과 조공 외교의 형식만 존재했던 청에게 있어 대외무역이나 외교 분야에서의 언어 소통은 오랫동안 국내적 문제로 보아 청의 번역자 및 번역 대상은 변화가 없었다. 이후 아편전쟁을 계기로 청의 지식인들 사이에 자국의 번역 및 통역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그때까지 생각지 않았던 서구 언어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양무운동의 한 가지 큰 목표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번역과 통역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청의 번역의 역사에서 번역은 ‘민족의 융화, 새로운 지식의 흡수, 국민의 계몽, 사회 변혁의 실현’이라는 가치관에 의해 지지된, 사회성을 지닌 일종의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번역 · 번역자는 원전(original text) 이외의 무엇에 충실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문하면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발휘하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작(manipulation)을 가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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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어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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