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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과 일본의 번역 사업과 사상 수용- '자유'의 경우(上)

근대 번역의 역사-중국

by trans2be 2022. 3. 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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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왕 샤오위(王暁雨)
출처: 「東西學術硏究所紀要」, 제48집, 關西大學. 2015.4, pp.173~186.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번역어 '자유'와 메이지 초기의 계몽 사상가들
Ⅲ. 근대 중국의 지식인과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한 논쟁
Ⅳ. 글을 마치며

 

Ⅰ. 들어가는 말

  '자유(自由)'는 중국 고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말로 『후한서』, 『삼국지‧오주환(吳朱桓)』 등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수당 시대에 들어 불교의 성행과 함께 ‘자유’는 빈번히 사용되는데, 인과(因果)에 따른 사생(死生)에 구애받지 않음을 가리키고 있다. 당송시대 시가(詩歌)에서 ‘자유’의 용례가 많아졌고 명청시대 이르러서는 민간 문학 작품에서도 ‘자유’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후치주(胡其柱)의 「「자유(自由)」의 과거와 현재(前生今生)」에 따르면 만청(晩淸) 이전의 '자유(自由)'의 내포 의미는 이하의 세 종류이다.

“하나는 칠칠치 못하고 멋대로 행동한다고 하는 부정적 의미가 있다. 동시에 또 하나는 자발적으로 일을 행한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그 안에 약간 들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자재, 구속도 속박도 없다고 하는 중성적인 의미이다. 첫 번째의 의미가 만청 이전의 문장에 주도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자유"는 항상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행위로 힐난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면, '멋대로'와 대응하거나 혹은 '방자함'과 같게 되므로, '자유'의 의미는 구속이 없음, 제멋대로임, 게다가 엉터리, 하고 싶은 대로, 독단에 의한 전행(專行) 등의 부정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자유'는 한자어가 수입됨에 따라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어대사전』에 따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유'는 (특히 중고, 중세의 고문서 등에서의) 선례, 올바른 문서, 도리 등을 무시한 제멋대로의 자기 주장. 대부분 그 행위에 비난의 뜻으로 쓰인다. 제멋대로 굴다.

  메이지 이전의 일본어에서의 '자유'에 관해서는 쓰다 소키치(田左右吉) 및 고보리 게이이치로(小堀桂一郎)의 논문에서 논구한 바가 있다. 요약해 보면 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제멋대로'라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콘텍스트에 입각한 생사에 구애받지 않는 '초탈'의 의미이다.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1574~1600)의 기리시탄(기독교) 문헌에서 '자유'는 선종(불교)의 자유와 의미가 비슷하여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초탈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자유’는 번역어로 일본에서 시작하여 다시 역사적인 무대로 올라와 활약했다. 난학(蘭學) 시대부터 ‘자유’는 이미 네덜란드어의 ‘liberty’와 ‘freedom’의 번역어로 사용됐다. 이와 관련하여 야나부 아키라(柳父章)의 『번역 성립 사정(飜譯成立事情)』에서 '자유'의 한 구절을 언급한 바 있다. 사실 네덜란드어 사전보다 빠른 라틴어 사전 및 포르투갈어 사전에는 이미 ‘자유’의 모습이 발견된다. 1595년 예수회 선교사와 일본 수도사가 나가사키(長崎)에서 편찬한 『라포일대역사전(羅葡日對譯辭典:라틴어-포르투갈어-일본어 대역사전)』에서는 '자유'를 라틴어 'libertas'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이 사전은 ‘자유’라는 번역어를 택한 이유에 대한 기술은 없었지만 사전의 머리말에서 본 사전 번역어의 '전아함'을 강조했다. 당시 일본에서 한자어, 특히 불교 용어를 전아한 말로 숭상하는 것을 보면 ‘자유’가 불교 문맥에서의 '속박이 없는 자유자재'라는 의미를 빌려 라틴어 'libertas'에 대응하여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편찬된 『일포 사전(日葡辭典: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은 이 번역어를 계승하였다. 난학 시대에 이르러 최초의 난화 대사전인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波留麻和解)」(1796년)에서는 네덜란드어 ‘vrijwil'lig(자유의지의-역자 주)’에 대해서는 ‘자유(自由)로이 하다, 장해(障害) 없이 자재(自在)로 활동하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 후의 『화란 자휘(和蘭字彙)』(1855년)도 마찬가지로 ‘vrijwil'lig’의 번역어로 '자유(自由)'를 사용하였다. 영학(英學)시대가 되면서 나온 첫 영어사전인  「안게리아 어림대성(諳厄利亜語林大成)」(1814년)에서는 ‘liberty’ 항목 아래 “리헤루디(リヘルデイ); 자유(自有) 또는 방종(放縱, ほしいまま)”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의 ‘自有’는 ‘자유(自由)’일 가능성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附音揷圖英和字彙
「부음삽도영화자휘」(1873년)의 표제

  「화란자휘(和蘭字彙)」를 참조하여 편찬한 영일대역 수진사전(袖珍辭典)(1862년)에서는 'liberty'와 'freedom' 모두 '자유'로 번역하였다. 2년 후 출간된 불어명요(佛語名要)(1864년)의 번역어는 일본어-네덜란드어 사전(蘭日辭書)을 참조했던 까닭에 프랑스어 ‘liberté’의 번역어로 ‘자유’를 그대로 사용했다. 메이지 초기 19세기 전반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편찬한 영어사전이 연이어 일본에 유입되면서 근대 일본 번역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으로 1872년 나온 「영화 자전(英和字典)」과 이듬해의 「부음삽도영화자휘(附音揷圖英和字彙)」에서는 ‘liberty’와 ‘freedom’ 항목 하에 ‘자유’ 이외에도 "자주, 불기(不羈), 자주지권(自主之權), 임의, 관대" 등의 번역어가 나타났다. 메이지 12년(1879) 쓰다 센(津田仙) 등이 훈점을 단 「영화화역자전(英華和譯字典)」이 출판되었고, 메이지 17년(1884)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郎)에 의해 「정증영화자전(訂增英和字典)」이 출판되어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번역어가 일본에 받아들여졌다. 중국으로부터 '자주(自主), 임의(任意), 관홍(寬弘)'은 'liberty'나 'freedom'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시작한 '자유'와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메이지 초기의 지식인들은 'liberty'나 'freedom'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자유, 자주, 불기, 자재' 등 몇몇 번역어에서 적절한 번역어를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1872년 나카무라 마사오(中村正直)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On Liberty를 「자유지리(自由之理)」라는 제명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이 번역본은 일본에 자유사상의 붐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자유’도 일본 전역에 퍼져 ‘liberty’나 ‘freedom’의 번역어로 정착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잠시 떠돌고 있던 량치차오(梁啓超)의 선전 활동 덕분에 ‘자유’는 20세기 초 중국에 소개돼 중국 지식인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다. 이 풍조와 함께 ‘자유’는 20세기 초엽의 중국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자유」는 근대에 성립한 번역어이지만 단순한 번역어가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자유정신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자유'라는 번역어의 성립 과정에는 근대 중국과 일본 양국의 자유정신에 대한 수용의 역사도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번역어 성립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이 자유정신의 수용의 역사를 논할 때 자주 언급해왔다. 그러나 선행 연구는 사상사나 언어사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많을 뿐 번역사의 관점에서 번역어 성립과 사상 수용의 갈등을 탐구하는 연구는 아직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은 ‘자유’를 하나의 번역어, 나아가 자유정신의 핵심 개념으로 다루어 근대 중국과 일본 지식인이 번역 활동을 통해 사상 수용에 가한 영향을 탐구하였다.


Ⅱ, 번역어 '자유'와 메이지 초기의 계몽 사상가들

1. 후쿠자와 유키치와 번역어 '자유'

 ‘자유’는 번역어로 남만(南蠻) 시대의 사전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한 번역어로 아직 하나의 '개념'이라 말할 수 없다. ‘자유’라는 말을 서양으로부터의 ‘자유 정신’과 관련시켜 일본 국민에게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866년에 출판된 「서양사정 초편(西洋事情‧初篇)」의 권두에서 후쿠자와는 이미 ‘자유’란 말을 사용했다. 서양의 '문명의 정치'의 '6개 조의 요결'에서 제1조는 그 '자주임의(自主任意)'였다. 여기서 후쿠자와가 처음으로 '자유'를 '문명'과 관련시켰다. 또 ‘문명의 자유’를 주창하기 위해 후쿠자와는 ‘문명의 자유’와 ‘야만의 자유’의 구별을 강조했다. 「서양사정 외편(外編)」의 「세상의 문명개화」에서 후쿠자와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야만적 자유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문명의 자유’는 “문명개화에 따라 법을 만들고, 세간에 한결같이 이를 시행해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운 바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서양사정 2편> 제1권에서 인간의 권리를 논했을 때 주해(注解)에서 "야만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는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먹고 자는 데에 항상스러움이 없으며 무지 무학(無智無學)인데도 스스로 편안히 만족하여 세상 풍속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 채로 꾸물거리는 벌레로 허송세월 하는 것을 말한다. 대저 문화가 융성한 세계에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바의 자유로다."라고 재차 '야만의 자유'를 비판하고 '문명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후쿠자와가 일본 국민에게 제창했던 것은 허랑방탕한 '야만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의 법률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문명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달성해야만 사회가 '문명개화'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문명의 자유'를 올바르게 일본 국민에게 전할 수 있도록 '자유'라는 번역어의 해설에 대해 후쿠자와 역시 여러 궁리를 했다. 「서양사정 초편」에서 처음 보인 ‘자유’에 대하여 그는 "본문의 자주‧임의‧자유라는 말은 허랑방탕하여 국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오로지 그 나라에 살며 사람과 교제하매 거리낌이나 겸손함이 없이 오직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이니, 영어로 이를 ‘후리도무(freedom)’ 또는 ‘리베루치(liberty)’라 하는데 아직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는 설명을 달았다. 이를 보면 당시 그는 ‘자유’와 ‘자주임의’를 쓰면서도 번역어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출판된 「서양사정 외편」과 「서양사정 2편」에서 그는 거의 ‘자유’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유’라는 번역어는 원래 일본에는 없는 개념인 까닭에 과연 적절하다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는 우려했던 듯하며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서 충분히 의미를 제한하기 위해 주석을 달고 있었다. 더구나 앞의 문장에 보이듯 그는 자유의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자유의 권리에 대한 제한 역시 강조했다. 「서양사정 외편」의 '권리'를 논한 부분에 추가한 해설에서, 후쿠자와는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방해해서는 안되며, 국법이나 제도의 허용 범위 내에서 추구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서양사정 2편」의 예문에서 그는 번역어 선택의 어려움을 한탄하며 ‘통의(通義)’와 ‘자유’ 두 번역어를 놓고 번역의 요의를 논하였다. 글 속에서 독자 또는 학자가 ‘자유’를 ‘허랑방탕함’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자유’가 전통적 문맥에서의 부정적 의미를 삼가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1872년 출판한 「동몽교초(童蒙敎草)」의 서문에서 그는 ‘자유’의 남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자유’를 이용하여 방자하고 무뢰한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한번 이런 규범을 벗어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에 출판된 「학문의 권장」은 권두에 천부인권을 주창하는 것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는 이 명작에서도 자유 권리를 제창하는 한편으로 자유 권리의 제한을 훈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후쿠자와는 ‘자유’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자유 권리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유’라는 번역어나 자유의 권리 역시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사실 후쿠자와는 자유의 권리를 제한하는 동시에 '자유'라는 번역어를 전통 문맥에 있어서의 ‘허랑방탕'의 내포 의미로부터 떼어내어 근대 문명 사회의 새로운 '자유'로 교체하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사정 2편」의 예문에서 후쿠자와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자주·자전(自專)·자득·임의·관용' 등의 번역어가 완전히 원어의 의미를 모두 나타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 자유'를 선택한 것을 보면 후쿠자와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이러한 번역어와 비교하여 '자유' 역시 불충분한 부분도 있지만 한층 더 원어의 의미를 잘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후쿠자와가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자유의 권리에 대한 제한과 호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메이지 초기의 계몽 지식인들과 '자유'라는 번역어의 성립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필두로 메이지 초기의 계몽 지식인들은 일본 국민에게 서양의 정치나 문화 등을 소개하며 근대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사물을 일본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계몽 지식인들도 이리저리 궁리했다. 새로운 개념의 번역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난학 시대의 번역어나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번역어 등이 혼용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libert' 나 'freedom'의 번역어에 대해서도 중국의 영화(英華) 사전에서 온 '자주, 자재(自在)'와 난화 사전에서 비롯한 '불기(不羈), 자유' 등이 병용되고 있었다.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처음에는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 중국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자주'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가토가 「도나리 구사(隣草)」 뒤에 쓴 초고 중에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는 제목으로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후레이헤이드(フレイヘイド)'를 소개한 문장이 있다. 문장 중에서 '후레이헤이드' 즉 'freedom'의 번역어에 대해 가토는 일본도 중국도 직역하지 못하며 일본어로 번역한다면 '자유자재' 혹은 '임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어 번역어에 관해 가토는 '후레이헤이드'의 함의로부터 분석을 통해 '자주'라는 번역어가 의역(意譯)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가토는 '자주'라는 번역어가 원어의 뜻을 다 드러낼 수 있는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 듯, 이후의 「진정대의 초고(眞政大意草稿)」에서는 '임의 자재(任意自在)'를 사용하였다. 1868년에 출판된 「입헌정체략(立憲政體略)」에서 '자재(自在)'라는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는 1870년 「진정대의」가 정식으로 출판되었을 때 가토는 ‘임의 자재’를 다시 ‘불기(不羈)’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서 고보리 게이이치로(小堀桂一郎)는 아마 「하루마 字解」(「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을 잘못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역자 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했다. 「진정대의」에서 가토는 인간의 '불기 자립(不羈自立)의 정(情)'을 인정하고 정부 및 헌법이 그 '불기 자립의 정'을 속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진정대의」에서 자유 권리를 언급했을 때 거의 '불기'를 사용하였다. 단지 한 번의 ‘자유’의 용례를 볼 수 있지만 의미에서 보면 여기서의 ‘자유’는 전통적 문맥에서의 ‘임의 방탕’의 뜻으로 사용했다. 그렇지만 1872년부터 1874년 사이에 번역 출판된 「일반 국법학(一般國法學)」에서 가토는 ‘자유’를 독일어 ‘freiheit’의 번역어로 사용했다. 그 뒤 문장에서도 계속 ‘자유’를 사용했다. 그 시기 실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의 「자유지리(自由之理)」가 유행하여 ‘자유’라는 말도 정착해 가고 있던 시기이므로 가토도 아마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871년 영국에서 귀국한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존 스튜어트 밀의 「On liberty」를 번역하여 「자유지리」라는 서명을 붙여 이듬해 펴냈다. 나카무라의 번역본 「자유지리」가 출간된 이후 지식인,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후 자유민권 운동의 지역 지도자였던 고우노 히로나카(河野広中:1849~1923)는 이 책에 마음을 빼앗겼다. "걸핏하면 양이(攘夷)를 부르짖던 종래의 사상이 하루아침에 대혁명을 일으켜, 충효(忠孝)라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기존에 있던 사상이 산산조각으로 깨짐과 동시에 사람의 자유,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함을 알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실은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처음에는 ‘자유’를 ‘liberty’의 번역어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학자 출신인 나카무라는 중국의 「영화 사전」의 영향을 받아 ‘자주’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자유지리」 이전에 번역한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에서 나카무라가 사용한 것은 ‘자주’였다. 「자유지리」에서 '자유지리'라는 번역어 옆에 '자주지리(自主之理)'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주해하였다. 이는 영화 자전, 특히 모리슨(Robert Morrison:1789~1834)의 『영화 자전(英華字典)』에서의 '자주지리(自主之理)'라는 번역어를 이어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지리」에서는 주로 '자유'를 사용하였고 '자주'는 '독립 자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1874년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서학 일반(西學一斑)」에서 '인민 자유 자립', '자유지권' 등을 사용하여 '자유'를 '전권(專權)‘이나 '전제(專制)' 등의 말과 대응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나카무라는 중국의 영화 사전의 번역어를 넘어, 자주적으로 '자유'라는 번역어를 구축하고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근대 일본 학술 용어의 창안에 큰 힘을 바친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는 '자유'에 대해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시가 1868년에 번역한 「만국공법(萬國公法)」에서는 '자주(自主)'를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중국의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범례에서도 중국어에서의 번역어를 차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듬해 니시가 쓰다 마미치(津田眞道:1829~1903)와 함께 공동 출판한 「성법략(性法略)」에서 사용한 것은 '자재(自在)', 그와 동시에 '자주지권(自主之權)'도 사용하였다. 니시가 「백학연환(百學連環)」에서 'liberty'의 번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자재'나 '자유자재'였다. 또 'liberty of press'는 '인쇄 자재(印刷自在)', 'free right'는 '자재지권(自在之權)'으로 번역하였다. 니시는 초고나 주석 같은 비공식 문서에서만 '자유'를 사용한 적이 있을 뿐, 공식 문서에서는 다른 말로 자유를 대체했다. 메이지 10년대에 쓴 「헌법 초안(憲法草案)」에서 종교의 자유를 언급했을 때 니시가 사용한 것은 '자재'였다. 실은 주석의 「편차(編次)의 대의(大意)」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자유'였다. 게다가 '자유'가 많이 사용되고 있던 「메이로쿠 잡지(明六雜誌)」에서도 니시는 '자유'가 아닌 '자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니시 아마네 전집(西周全集)」에 수록되어 있는 「등영문답(燈影問答)」에서 니시는 '자유'를 사용하고 있다. 글에서 니시는 서양의 자유사상에 입각하여 '자유'를 유교의 성(性) 사상과 결합하여 인간의 본성'을 논하였다. 이 글은 니시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고보리 게이이치로는 이 글에서의 '자유'의 용례를 증거로 니시가 '자유'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제자와 선생님의 대담으로 기록자가 니시 본인이 아니었다. 대담 당시의 용어를 그대로 기록했는지 추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들어 니시가 '자유'라는 번역어를 인정한 증거라고 취급하는 것은 조금 불충분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니시 자신은 직접적으로 '자유'라는 번역어를 논한 적이 없다. '자유'를 사용한 것은 「자유는 자주로 이루는 것임을 설함(自由は自主に成るの説)」과 「아편협모씨법가철학단편(阿編狹母氏法家哲學斷片)」에서 였다. 이는 때마침 자유민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자유'라는 말이 떠돌던 시기였다. 글에서 니시는 자유의 한계를 강조하고, 국민에게 '자유'와 '임의 방탕'의 한계를 주의시키며 '자유'의 남용을 경계하였다. 이로부터 니시가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해 가졌던 고민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874년 모리 아리노리(森有礼:1847~1889)와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1828~1902) 두 사람이 애쓴 덕분에 메이로쿠사(明六社)가 결성됐다. 「메이로쿠 잡지」도 기관지로 같은 해에 간행되었다. 이 잡지는 1875년 11월 14일 정간까지 총 43호가 발행되었다. 사장으로 모리 아리노리가 창립 1주년 기념 강연에서 매월 팔린 부수가 평균 3,205권이라고 밝혔다. 이 숫자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판매량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로쿠 잡지」의 독자층이 넓은데다 다른 인쇄물에 전재되는 경우도 많았기에 메이지 초기의 사상 계몽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이로쿠 잡지」에서 '자유'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이 시기 '자유'는 이미 'liberty'나 'freedom'의 번역어로 취급되어 메이로쿠사를 대표로 하는 지식인에게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메이로쿠 잡지」 43호에서 '자유'의 용례가 보이는 부분은 280개소로, '자주'의 47개소와 '자재'의 7개소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자주'라는 말은 '자유'와 조합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의미도 '독립 자주'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영화 사전으로부터 이입된 '자주'는 메이로쿠사의 지식인에게 'liberty'나 'freedom'의 번역어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자유'의 용례 가운데 책의 일부분에서 전통 문맥에서의 '허랑방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 이외에 '자유의 권리'의 의미를 나타내는 용례가 많다. 더구나 '자유지권'이라는 형태로 사용되어 '문명' '개화' '권리' '국민의 기질' 등과 같은 말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자유'는 자유의 권리의 키워드로서 지식인에게 사용되는 한편, 이미 서양 문명의 대명사, 또는 일본 '문명개화'의 목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유민권 운동을 계기로 일본인은 개인의 권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유민권을 옹호하게 됐다. 일본 사회에서는 각 정당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유'라는 개념이 확립되기에 이른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1837~1919) 등에 의해 설립된 릿시사(立志社)는 천부인권에 근거하여 민권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1880년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1858~1892) 등은 <자유당 준비회(自由黨準備會)>를 조직하고 조직의 맹약 제1조에 "오당(吾黨)은 자유를 확충하고 권리를 보전할" 것임을 내세우고 있다. 1881년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1849~1940), 나카에 초민(中江兆民:1847~1901)을 중심으로 「도요지유 신문(東洋自由新聞)」이 창간되면서 '자유'라는 말은 널리 알려졌다. 같은 해 자유당이 발족하여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주권재민'을 부르짖었다. 이를 보면 일본의 '자유' 개념은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천부인권 사상을 토대로 국민 주권을 강조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제적 체제를 무너뜨리는 사상의 대명사로서 근대적 정치 개념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야나부 아키라는 메이지 초기의 지식인들이 '자유'라는 번역어에 대해 의문과 저항을 가지고 있다가 메이지 7, 8년 경에 비로소 그러한 저항을 포기하고 받아들였다고 진술하였다. 필자는 그런 표현에 조금 찬성하지 않는 바가 있다. 확실히 니시 아마네처럼 '자유'의 사용을 꺼려하고 있는 행동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지식인, 예를 들어 가토 히로유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등이 '자유'라는 번역어를 놓고 여러 모색을 했다고 해서 이를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지 단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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