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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백 년 - 프랑스 문학과 일본의 근대

번역 백년

by trans2be 2022. 4. 2.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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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니시나가 요시나리(西永良成)

출처: 『飜譯百年』, 大修館書店, 2000, pp.49~65.

 

   
 

         목  차

Ⅰ. 프랑스학의 시작
Ⅱ. 메이지 시대의 프랑스 문학
Ⅲ. 도쿄 외국어 대학 출신의 문학가와 번역가
Ⅳ. 세계 문학의 동 시대성과 현존 작가의 번역
Ⅴ.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

Ⅵ. 번역자의 숙명과 즐거움

 

西永良成, 니시나가-요시노리
필자 니시나가 요시나리 ( 西永良成 )

Ⅰ. 프랑스학의 시작

  오늘은 프랑스 문학의 번역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일본인이 어떻게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부터 언급해보기로 하죠. 1808년 당시 일본령이었던 가라후토(樺太:현재의 사할린 제도) 남부에 해국 대위 니콜라이 바스트로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병들이 들어와 약탈하면서 한 통의 외국 문자로 된 편지를 남깁니다. 당시 가라후토를 관할하고 있던 마츠마에 번(松前藩)의 관리는 이를 기괴하고 기이하게 여겨 재빨리 막부로 보냅니다. 막부 역시도 편지의 의미는 고사하고 그것이 무슨 문자로 쓴 것인지 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가사키(長崎)의 네덜란드 상관장 헨드릭 도프(Hendrik Doeff, 1777~1835)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도프는 프랑스어를 알고 있어 그 편지를 번역해보았더니 꽤 강경한 어조로 개국과 통상을 요구하는 문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번역한다면 막부의 눈 밖에 날 것이 뻔해서 역시 도프도 표현의 강도를 낮추어 번역해야만 했습니다. 그야 어찌 되었건 막부는 그로 인해 적어도 서양에는 프랑스어라는 문자가 있고, 이 프랑스어가 국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외교 용어이니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텐몬카타(天文方: 에도 막부 시대에 천문 · 역산 · 측량 · 서양 서적의 번역을 관할하던 곳)에서 네덜란드어, 중국어(淸語) 이외에 프랑스어를 학습시킬 것을 명하였습니다. 도쿄 외국어 대학의 연혁을 거슬러 올라가면 텐몬카타의 후신이 되며 안세이(安政) 5년(1857) 개설된 반쇼 시라베쇼(蕃書調所)까지 소급할 수 있으니, 도쿄 외국어 대학이야말로 일본인이 최초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한 기원이 되는 학당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佛語明要, 불어명요
불어명요

  도쿄 외국어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적지 않은 희귀본 가운데 지금 여기 보여드리는 것은 무라카미 히데토시(村上英俊)가 저술한 「불어명요(佛語明要)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겐지(元治) 1년(1864) 출판된 일본 최초의 불화사전(佛和辭典)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1868년의 일이니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이미 이와 같은 사전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지요. 무라카미 히데토시는 일본 역사상 프랑스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익혔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프랑스어를 배우게 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는데, 때마침 친구였던 마츠시로 번(松代藩)의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권유로 총포 제조 기술을 연구하려고 스웨덴의 과학자 베르셀리우스(Berzelius, Jöns Jacob)가 쓴 「화학 제요(化學提要)」의 네덜란드어 판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것이 아닌 프랑스어 번역본(Traite de Chimie Minerale, Vegetale et Animale)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당시는 페리의 흑선(黑船) 소동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고, 또 서양 서적 자체가 귀중품이었던 까닭에 재차 네덜란드어 판을 주문할 시간적, 재정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히데토시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혼자 알아서 프랑스어를 공부해보자’라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이후 그때의 일을 「불어명요의 서문에서 회고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5개월 만에 대략 문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심한 치통을 견디어가며 매일 밤을 새워 공부를 지속한지 16개월 만에 드디어 「화학 제요」를 완전히 해독하였는데,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글로도 다할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매일 이를 악물고 치통을 견뎌가며 처음 세운 뜻을 관철한다고 하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외국어 습득의 일화입니다. 

  어쨌든 이를 기회로 무라카미 히데토시는 프랑스어 연구 및 프랑스어 교육으로 나아가 「삼국편람(三國便覽)」 등 몇 권의 프랑스어 참고서를 쓰고 <다츠리도우(達理堂)>라는 프랑스학 사숙(私塾)을 개교하여 후진을 지도합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도사 번(土佐藩) 번사 나카에 도쿠스케(中江篤介) 즉 후일의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이 있습니다. 초민은 자유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한역(漢譯) 「민약 역해(民約譯解)」의 일본어 역자로 한때 도쿄 외국어 대학의 전신인 도쿄 외국어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인데, 그 역시 후일 <부츠가쿠주쿠(佛學塾)>을 엽니다. 그 <부츠가쿠주쿠>는 1887년 초민의 교열로 역시 「불화사림(佛和辭林)」이라는 제목으로 불화 사전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있는 이 사전으로 도쿄 외국어 대학의 영세한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희귀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라카미 히데토시의 불어명요는 어휘가 삼만 오천 자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종의 단어장, 어휘집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달리 초민이 교열한 이 사전은 단순히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이 아니라 복수의 단어를 조합하면 이러한 숙어가 된다던가, 동사와 명사를 조합하면 이러이러한 의미의 표현이 된다는 등, 꽤 상세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초민의 이 사전도 불어명요와 마찬가지로 발음의 표기는 없습니다. 막부 말기와 같이 메이지 시기가 되었어도 프랑스어의 수요와 수용은 다만 원서 강독 정도에 그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래도 이 책은 일본 메이지 시대 선학들의 대단한 학습 의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참으로 뛰어나게 충실한 내용을 갖추고 있는 사전이라 생각합니다.  


Ⅱ. 메이지 시대의 프랑스 문학

「 신설 팔십일 간 세계 일주(新說八十日間世界一周) 」 후편

  사전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고 프랑스 문학의 번역으로 화제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와시마 초노스케(川島忠之助)가 메이지 10년 그러니까 1878년에 쥘 베른(Jules Verne)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신설 팔십일 간 세계 일주(新說八十日間世界一周)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것이 프랑스어에서 직역한 첫 번째 번역입니다.(실제로는 전체 2편 가운데 1편은 메이지 11년 6월 27일 간행되었다. 후편은 2년 뒤 메이지 13년에 간행되었다-역자 주) 베른의 이 이야기는 아동 문학으로 개작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해서 아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이 번역이 효시가 되어 ‘메이지’라는 시대는 각 쿠니(國)의 번주(藩主)를 통솔하는 봉건 국가를 예전엔 민족 국가, 근년에 이르러서는 국민 국가로 불리는 형태로 재편하기 위한 '부국 강병책'을 강행한, 이른바 '근대화'를 무조건적으로 서두르면서 오로지 서구의 문명을 배우고 과학 기술을 도입하던 시대이므로, 쥘 베른의 과학 소설이 속속 번역되어 상당히 많은 독자를 획득했던 것 같습니다. 미래 소설에 가까운 이런 책들이 거의 곧 현실화될 가까운 미래를 다루는 소설로 읽혔던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프랑스 문학의 번역은 쥘 베른 이외에도 빅토르 위고나 알렉산더 뒤마 등과 같이, 말하자면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온몸을 약동시키는 모험 소설이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에도 레미제라블이란 뮤지컬로 세계에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위고의 작품이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기꺼이 번역되어 수용되었던 것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1839~1919)라는 정치가의 공적이라고 합니다. 자유민권 운동의 지도자였던 이타가키는 이른바 기후(岐阜) 조난 사건(1882년 4월 6일 기후에서 자유당 당수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당시 보수주의에 경도된 소학교 교원 아이하라 나오부미(相原尚褧)에게 습격당한 사건-역자 주)으로 흉한 나오부미에게 칼부림을 당했을 때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친 인물로, 그 사건 이후 한동안 외유를 떠납니다. 그리고 1883년(메이지 16)에 만년의 빅토르 위고와 파리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당시 마흔여섯 살이었던 이타가키가 "일본과 같은 후진국의 국민에게 널리 자유민권 운동의 사상을 보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치렁치렁한 백발의 여든두 살의 위고는 "거기에 적당한 소설을 읽도록 하는 것이 최고라네"라고 대답합니다. "소설이라면 도대체 어떤 소설을 말씀하시는지요?"라고 이타가키가 묻자 "내가 요 이십 년간 쓴 것이라면 무엇이건 좋을 걸세"라고 대답합니다. 이타가키가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일 수 없다"는 명문구를 남긴 남자라면, 위고는 "만약 프랑스인 열 명이 추방된다고 하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 명이라면 나도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한 명이 추방당한다고 하면 그 한 명도 나일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프랑스 이외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프랑스 제2 제정 하에서 나폴레옹 3세에게 철저히 저항하며 19년간 국외 추방을 견디어냈던 작가였습니다. 분명 그런 박력에 각별한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후일 위고와 비슷하게 백발이 되도록 머리를 길렀던 이타가키는 구미 토산품 가운데 위고의 소설을 포함한 상당량의 서양 소설을 사 가지고 돌아옵니다. 이를 계기로 '번역 왕'의 명성을 얻은 모리타 시겐(森田思軒) 등의 번역 작업이 흥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리타 시겐은 프랑스혁명과 관련해서 쓴 위고의 소설 93년 등과 가와시마 초노스케를 뒤이어 쥘 베른의 소설도 연이어 번역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요, 이러한 모리타 시겐과 함께 당시 ‘스타’ 번역자로 구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가 있습니다. 구로이와 루이코는 위고의 레미제라블희 무정(噫無情)으로, 또 알렉산더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암굴 왕(暗窟王)」으로 번역하여 여전히 메이지 시대의 번역자라 할 수 없을 만큼 그 이름이 익숙한 인물입니다. 다만 모리시타 시겐과 구로이와 루이코와 같은 인물은 가와시마 초노스케와는 달리 프랑스어를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부터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중역(重譯)’이지요. 게다가 꼭 원작에 충실한 번역도 아니어서 원문을 적당히 취사선택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이러한 번역을 당시에는 '호걸역(豪傑譯)'이라 불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원어로부터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을 '조밀역(稠密譯)'으로 불렀습니다. 가와시마가 이런 조밀역의 선구자였다면 오사다 슈토(長田秋濤)는 대표자였습니다.


  오사다 슈토는 도쿠가와막부의 고관(高官)의 자제로 3년 정도 프랑스에서 머물렀는데, 그때에 여러 연극 공연장의 배우 대기실도 그의 이름 하나면 무사통과였고,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라는 유명한 여배우 등과 교유했던 대단한 프랑스 통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이름을 유난히 유명하게 한 것은 「암굴 왕」의 저자 알렉산더 뒤마의 아들 뒤마 휘스의 춘희(椿姬, La Dame aux camélias) 번역이었습니다.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라」의 원작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구로이와 루이코가 위고의 레미제라블희 무정으로 옮겼는데요. 원래 그 뜻은 ‘비참한 사람들’ 혹은 ‘가엾은 사람들’ 정도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춘희의 원제는 ‘동백꽃을 든 부인’ 정도가 올바른 원 제목의 뜻입니다. 이를 ‘춘희’라는 제명을 붙인 오사다 슈토의 경우도 대단하지요. 프랑스 소설의 제목을 교묘하게 번역하여 붙이는 경우를 또 하나 예로 든다면 일찍이 작가의 직감으로 마쓰가와(松川) 사건 재판의 기만성을 철저하게 폭로한 일로 알려진 작가 히로쓰 카즈오(廣津和郎, 1891~1968)가 있습니다. 히로쓰 카즈오는 메이지 시대의 인기 작가인 히로쓰 류로(廣津柳浪, 1861~19280의 아들(차남)로, 그다지 팔리지 않던 작가 시절에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Une Vie을 영어에서 중역합니다. 프랑스어의 원제목은 ‘어느 일생’입니다. '비 Vie'는 확실히 ‘일생’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윈느 Une'라는 것은 ‘하나의, 어느’ 정도의 의미로 여성 명사에 붙는 부정 관사인 까닭에 ‘여자의’라는 것은 오역입니다. 그러나 이 번역이 오히려 내용과 딱 맞아떨어졌던 것일까요, 어찌 되었건 간에 히로쓰가 번역한 여자의 일생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해서 그는 그 인세만으로 ‘일생’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수년간은 생활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팔리지 않는 번역자 나부랭이로서는 참으로 부러울 뿐이죠.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군요. 메이지 시대 프랑스 문학의 번역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지요. 메이지 시대, 하고도 30년대 후반이 되면 상황이 많이 변화하게 됩니다. 메이지 6년에 일본에 와서 이후 22년간 프랑스 민법과 형법을 근대 일본에 이식하려 노력한 인물로, 유명한 '법전 논쟁'에서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프랑스적 법=권리 감각이 ‘일본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의 속에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던 법학자 보와소나드(Boissonade, Gustave Émile, 1825~1910)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당시 정치 정세는 프로이센 헌법을 전범으로 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중심으로 한 「집단주의=덕의 주의(德義主義)=국가 통제 주의」로 기울어 갑니다. 이와 함께 이타가키 다이스케 일파의 자유민권 운동도 쇠퇴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문학의 번역 상황 역시 변화하여 베른, 위고, 뒤마 등을 대신하여 이번에는 모파상, 알퐁스 도데, 에밀 졸라 등 자연주의 작가들이 번역되기에 이릅니다.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1959)가 이른바 ‘모파상 선생’을 숭배하여 그의 작품을 번역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독일어에 능통했던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조차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쓰가와 사건
1949년 8월 17일 오전 3시 9분(당시는 미국 점령군에 의해 섬머 타임이 적용되고 있던 까닭에 현재로 치면 오전 2시 9분이 됨) 후쿠시마현 마쓰가와 쵸(町)를 통과하던 도후쿠 본선(東北本線)의 열차(C51형 증기 기관차)가 갑자기 탈선 · 전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수사하던 당국은 당시 대량 인원 감축을 반대하고 있던 노조 및 국철 노동조합 그리고 일본 공산당의 모의에 의한 범행으로 단정하고 노동조합 관계자를 체포, 기소하였다. 재판은 1심, 2심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의 무죄가 드러나게 되자 작가 히로쓰 카즈오는 「주오 코론(中央公論)」을 통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자 연이어 많은 지식인과 작가들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기에 이르러 사회적 파장이 상당했다. 이 사건은 1963년이 되어서야 무죄로 최종 판결이 났다.


Ⅲ. 도쿄 외국어 대학 출신의 문학가와 번역가

  그런데 나가이 가후는 프랑스 이야기 (ふらんす物語)의 작가, 또 보들레르나 베를렌 등 프랑스 시의 번역 시집 「산고슈(珊瑚集)」의 역자로서 유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그가 학생 시절 프랑스어를 배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도쿄 외국어 대학교에서 배운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라 중국어였습니다. 도쿄 외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저로서는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만, 뭐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러분, 메이지 43년(1910) 대역 사건(大逆事件)이라는 것이 일어났음은 알고 계시겠지요. 나카에 초민의 제자였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 일파가 '메이지 천황 암살 계획'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졸속으로 진행된 강압적 재판 결과 처형되어, 국제적인 비난까지 초래한 사건입니다. 나가이 가후는 이보다 10년 전쯤 프랑스에서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부는 유대인인 데다가 적국인 독일 국경 지대인 알자스 출신이었던 드레퓌스 대위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반역죄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재판한 사건입니다. 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나는 탄핵한다 J’accuse!''는 제하에 용기 있게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논진을 편 인물이 에밀 졸라였습니다. 나가이 가후는 거의 같은 종류의 사건(대역 사건)에서 같은 작가로서 과감한 행동을 실행했던 졸라와, 그런 졸라로부터 깊은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의 격차에 절망하여, 그 사건 이후 동시대의 사회적 동향과는 등을 지고 스스로를 에도 시기의 게사쿠(戱作) 작가로 자처하게 되었다는 경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나가이 가후와는 대조적으로 대역 사건 이후 더욱더 무정부주의적 활동을 전개해나가다가, 1923년 간토 대지진(關東大地震)의 계엄령 하에서 헌병에게 학살된 인물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입니다. 오스기 사카에는 도쿄 외대의 프랑스어과 졸업생인데 아나키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장 파브르(Jean Henri Fabre, 1823~1915)의 곤충기 Souvenirs entomologiques를 일본 최초로 번역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제가 소속된 도쿄 외대 프랑스어과 졸업생으로 우수한 프랑스 문학의 번역을 남긴 인물로 근대 일본에서 가장 인기 높은 서정 시인 가운데 한 명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1907~1937)가 있습니다. 나카하라는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의 시를 아름답게 번역하여 남겼습니다. 나카하라에게 영향을 준 시인 도미나가 타로(富永太郞, 1901~1925) 역시 도쿄 외대 프랑스어과 출신입니다. 또 제가 아주 좋아했던 소설가 이시카와 준(石川淳, 1899~1987)이 있습니다. 그는 나카하라나 토미나가보다 더 연장자입니다만, 역시 다이쇼(大正) 시대에 도쿄 외대에서 불어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시카와 준은 독특한 문체로 알려져 있는데요, 타버린 땅의 예수(焼跡のイエス) 등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있는데 앙드레 지드의 소설 배덕자 L’Immoraliste 외에 몇 편의 프랑스 문학의 번역 작업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삼천포로 빠지는데요, 제 선배 격의 국문학자로 도쿄 외대에서 교수를 역임했던 인물이 언젠가 교무과에 보존되어 있는 오래된 기록을 조사했을 때 다이쇼 시대에 학생 시절을 보냈던 이시카와 준의 성적표를 발견했습니다. 무덤에 누워 있던 이사이((夷齋: 이시카와 준의 호-역자 주) 선생도 필시 깜짝 놀랄 일이겠습니다만, 오늘을 빌어 마음먹고 선생의 성적을 천하에 공개하겠습니다. 사실 그는 대단히 열심히 공부한 우등생으로 과목 모두가 갑-옛날에는 우양가가 아니라 갑을병으로 성적을 매겼습니다-이었고 오직 군사 교련 과목만 병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수재들은 지금도 자신의 성적이 모두 ‘우’였다고 뻐기기보다는, 저는 모두 ‘우’를 받았습니다, 단지 체육만은 별로였다고 말하는 편이 동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요, 이사이 선생은 그런 프랑스적 수재의 속물적 기준에 비추어보더라도 대단한 수재였다고 할 수 있어요. 덧붙인다면 아까 말씀드린 제 선배 교수는 나카하라 츄야의 성적에도 흥미를 품고 교무과의 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츄야가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올렸음을 발견하고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웬일인지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이왕 샛길로 빠진 김에 하나만 더 비화(?)를 폭로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시카와 준의 타버린 땅의 예수는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문학 단편집의 하나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프랑스어 번역 당시 번역자가 원문에 충실한지 아닌지 엄밀하게 체크하는 역할이 우연찮게 저에게 맡겨졌습니다. 이사이 선생에 대한 끝없는 경의와, 거기에 아무래도 고약한 취미를 가진 선배 교수 덕에 본의 아니게 선생의 학창 시절 성적까지 알게 된 마당이었기에 제가 성심성의를 다해 그 일에 열중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도쿄 외대 출신의 프랑스 문학 번역자로 야마노우치 요시오(山內義雄, 1894~1973)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야마노우치 선생은 오랫동안 와세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한동안 본 대학 프랑스어 학과에서도 강의를 하셨습니다. 선생이 번역했던 뒤마(Dumas, Alexandre, 1802~1870)의 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 Le Comte de Monte-Cristo-이 작품은 구로이와 루이코가 「암굴 왕(岩窟王)」이란 제목으로 호걸역으로 번역한 것입니다-이나, 마르탱 뒤가르( Martin du Gard, Roger, 1881~1958)의 장편 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 Les Thibault-모두 대단히 정밀한 번역이죠-을 중학교와 고교 시절에 읽지 않았더라면 저는 문학을 전공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입니다.  


Ⅳ. 세계 문학의 동 시대성과 현존 작가의 번역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프랑스 문학의 번역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문학에 무시하기 힘든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 비평을 확립한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가 랭보나 발레리 혹은 19세기 비평가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의 작품을 번역했던 것이나, 시인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 1900~1964)가 보들레르를 번역하고 소설가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1909~1988)가 스탕달의 연구자였다는 점, 비평가 나카무라 미쓰오(中村光夫, 1911~1988)가 플로베르 연구자로 자신의 이력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문학이 물밀듯 왕성하게 번역되기에 이르렀던 것은 뭐라고 하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습니다. 전쟁 중에 프랑스어는 적성 국가의 언어인 까닭에 물론 번역되지 않았죠. 다분히 그런 상황에 대한 반동도 있었을 것이고, 또 당시 일본은 미군에 점령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일종의 반발도 있었는지 문화, 문학적으로 프랑스 작품이 이상스레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문학 붐이라 불러도 좋을 현상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지속돼서, 일본은 흡사 프랑스 문학의 번영 왕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그 흔적으로 예컨대 신초 문고(新潮文庫)에 수록된 모든 작품 가운데 판매 누계가 가장 높은 작품이 사강(Sagan, Françoise)의 안녕? 슬픔 Bonjour tristesse(국내 번역본의 대다수 제목은 슬픔이여 안녕-역자 주)입니다. 이 번역본이 수백만 부나 팔렸고 다음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이방인 L'etranger인데, 이 역시 수백만 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나 카뮈의 번역 전집, 혹은 번역상 어떤 형태가 됐건 보들레르나 랭보 전집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난해하기로 알려진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등 이른바 누보로망 작가들까지도 신작이 나오면 곧바로 번역 출간했으니까요. 1960년대 중반에 청춘 시대를 보낸 제가 프랑스 문학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런 프랑스 문학열에 감염된 까닭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처음 제가 프랑스 문학자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70년대 중반부터는 그런 붐이 급속도로 꺼져가기 시작해서, 같은 프랑스 물이라 해도 철학이나 사상 예컨대 푸코, 데리다, 들뢰즈 또는 바르트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등의 저작을 주요 번역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은사나 선배들로부터 프랑스, 특히 현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자는 학술적 연구도 당연히 해나가면서 가능한 한 번역이나 작품 소개에도 시간을 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운 나쁘게 프랑스 문학 퇴조기를 만났음에도 그 가르침을 꽤 충실히 실행해왔습니다. 이제 조금은 시대가 변한 느낌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메이지 이후 쇼와 30년대까지의 현대 프랑스 작가의 번역과 그 이후 저희 세대의 번역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쇼와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에 걸친 누보로망 작가들의 번역 이후의 상황인데, 번역자들이 직접 원작자와 교제하는 방식을 통해, 예컨대 번역을 하다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올 경우 직접 편지를 써서 코멘트를 받거나 본인과 만나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번역자가 원작자를 단지 '우러러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직접 '마주 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통신이나 교통의 편리성이 증대하고 엔화 가치가 강화되면서 비교적 간단하게 유학이나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전과 비교하면 서로 간의 거리감이 없어지게 된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또 60년대 이후 누보로망 작가들이나 푸코, 데리다,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등의 철학자 및 사상가들도 꽤 자주 일본에 방문하여 각지에서 강연을 하거나 학자들과 교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도 있습니다. 그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일본에 방문할 기회라든지 혹은 프랑스 문학 연구자가 프랑스에 머물다가 우연히 읽거나 평판을 알고 흥미를 갖게 된 원작자를 직간접적으로 교섭하여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오랜동안 서로 알고 지내는 작가의 작품을 당사자의 요구에 의해 번역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번역되어 큰 호평을 받은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원작, 호리 시게키(堀戊樹) 번역의 악동 일기 Le grand cahier가 한 예입니다. 저의 경우는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작품 번역이 그런 예가 되겠군요.  


Ⅴ.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원래 체코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체코어로 농담 Zert 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국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작가였죠. 그런데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 즉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한 민주화 운동이 마침내 러시아의 군사개입에 의해 압살 된 결과, 그 운동에 참가했던 쿤데라는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하고 작품은 발금 처리됩니다. 자국어로 자국의 독자를 상대로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거기서 그만두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이른바 자신의 번역자를 유일한 독자로 상정하면서 체코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제가 번역한 웃음과 망각의 책 Směšné Lásky이라든지, 영화로도 제작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Nesnesitelná lehkost bytí 또는 국내에서도 큰 호평을 받은 불멸 Nesmrtelnost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의 성공으로 그는 세계적 작가가 되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일찍이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발표된 농담」, 생의 저편 Život je jinde」, 이별의 왈츠 Valčík na rozloučenou 등의 소설 번역은 어땠을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참에 다시 번역된 자신의 작품을 검토해보니 그것이 번역이 아니라 개작과 개찬(改竄)으로 분칠 되어 있음을 깨닫고 뜨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해나 들여 자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단행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 번역본만이 자신을 표현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프랑스어 번역본 대표작들이 체코어 텍스트에 버금가는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됐다고 인정하게 됐을 무렵인 1989년 말, 이번에는 갑자기 체코에서 '벨벳 혁명(1989)'이 일어나 돌연 그는 발매 금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굳이 프랑스어로 쓸 필요가 없어져서 체코어로 작품을 발표해도 좋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그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지 그는 체코어를 버리고 이후 직접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래서 쿤데라의 1990년대 작품, 그러니까 평론집 배반된 유언 Les testaments trahis, 소설 느림 La lenteur」, 정체성 L'identité은 최초로 프랑스어로 쓴 것들입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제가 번역했는데요, 그 가운데 가장 최근 번역한 진정한 나(정체성의 일본 번역판 제목-역자 주)는 작가의 각별한 호의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것도 프랑스보다 먼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번역자로서 저는 몇 번씩 수정 원고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생각한 점이나 사소한 오타를 지적하는 등의 이유로 자주 쿤데라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인데요, 그 때문인지 쿤데라의 소설관, 소설 작법, 그리고 번역관에 관한 다양한 귀중한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Ⅵ. 번역자의 숙명과 즐거움

  쿤데라의 번역론은 평론집 배반된 유언의 제4장 <하나의 문장>에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체코 태생으로 독일어로 글을 쓴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성(城) Das Schloss 가운데 한 절의 다양한 프랑스어 번역문을 열거하고 비교 검토한 후, 자신이 뽑은 가장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쿤데라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번역자로서 따라야만 하는 최고의 권위는 원작자 개인의 문체인 까닭에 그러한 충실함은 곧바로 번역문을 읽는 독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경우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다른 권위, 예컨대 프랑스어라면 아름다운 프랑스어 혹은 아름다운 일본어, 요컨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가르쳐줄 법한 프랑스어나 일본어 기타의 규범화된 공통의 문체라는 권위에 따름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작에 대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심미적 과오다. 왜냐하면 "약간이나마 가치가 있는 어떤 작가라도 <미문>에 위반되며, 그 위반 속에서 비로소 그/그녀 자신의 예술적 독창성(따라서 존재 이유)이 존재한다. 번역자의 첫 번째 노력은 그 위반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쿤데라는 오직 철저한 축어역만을 진정한 번역으로 인정하고, 카프카를 통해 그 모델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쿤데라의 이러한 번역관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그 유명한 번역자의 사명의 주장과 부분적으로 겹칩니다. 벤야민은 "번역자의 사명은 번역 언어로의 지향, 번역의 언어 속에서 원작의 정령을 불러내려는 그 지향을 찾아내려는 데에 있다"면서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이 독일어의 문법 체계를 무시하며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철저한 축어역이야말로 번역자의 모델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으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올바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구의 언어를 일본어로 번역할 경우 철저한 축어역으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프랑스어와 같은 서구 언어의 기본은 명사 구문이지만 일본어는 동사 구문입니다. 일본어에서 무턱대고 추상 명사를 주어로 하면 아무래도 생경한 번역투 문장이 돼버립니다. 또 관계 대명사라든지 대화체를 문장체로 편입시킨 간접화법 문장과 같이 원래 그대로로는 일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요소도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언어라도 문화적 배경이 존재하여 그것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속담 가운데 “traduttore, traditore”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자는 배반자"라는 의미입니다. 번역자는 우선 원문에 가능한 한 가깝게 축어역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번역가의 사명」에 충실하면 전달 불가능, 이해 불가능한 번역이 되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게 되죠. 반대로 읽기 쉬운 번역, 원숙한 번역을 마음먹으면 이번에는 원작을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든지 '배반'이 '번역자의 숙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또 완전한 번역이라는 것은 정의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서 번역은 항상 실패합니다. 배반과 실패야말로 번역자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자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일까요. 좋은 번역은 해석과 표현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과 같은 음악 연주에 비유됩니다. 원문이 악보라면 번역자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연주자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번역자는 때로 연주자의 쾌락과 흡사한 기쁨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연주자는 연주하면서 항상 악보, 그것을 남겨준 작곡가와 대화합니다. 번역자 또한 원작, 원작자 그리고 원작자가 사용한 외국어, 그 언어가 배경으로 하는 다른 문화와 대화하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코 자기와 동화, 동일시할 수 없는 진정한 타자와 만나고 타자를 발견합니다. 우리들 인간은 원래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 늘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대화하는 것은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며 또 인생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번역이란 작업은 그러한 타자의 발견과 인식, 타자의 문화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것, 그런 인생의 응축된 경험이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당장의 제 결론입니다.


【참고문헌】

富田仁․赤瀬雅子 공저, 「메이지의 프랑스 문학 : 프랑스학으로부터의 출발(明治のフランス文学 : フランス学からの出発)(東京 : 駿河台出版社, 1987.5)

Milan Kundera, 西永良成 역, 「배반당한 유언(裏切られた遺言)(東京 : 集英社, 1994.9)

西永良成, 「밀란 쿤데라의 사상(ミラン・クンデラの思想)(東京 : 平凡社, 1998.6)

Walter Benjamin, 淺井建二郞 편역, 「번역자의 사명(翻訳者の使命)」(エッセイの思想 벤야민 컬렉션 2, 東京 : 筑摩書房, 1996.4)

◆ 추천 프랑스 문학 일본 번역서(한국어 번역본이 있을 경우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임)

François Rabelais, 渡邊一夫 역, 가르강튀아 이야기, ガルガンチュワ物語, La vie très horrificque du Grand Gargantua(東京 : 岩波文庫)
Edmond Rostand, 辰野隆․鈴木信太郎 공역,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シラノ・ド・ベルジュラック, Cyrano de Bergerac(東京 : 岩波文庫)
Alexandre Dumas, 山內義雄 역, 몽테 크리스토 백작, モンテ・クリスト, Le Comte de Monte-Cristo(東京 : 岩波文庫)
Stendhal. 大岡昇平 역, 파르마의 수도원, パルムの僧院, La chartreuse de Parme(東京 : 新潮文庫)
Gustave Flaubert, 伊吹武彦 역, 보봐리 부인, ボヴァリー夫人, Madame Bovary(東京 : 岩波文庫)
Charles Baudelaire, 三浩達治 역, 파리의 우울, 巴里の憂欝, Le spleen de Paris(東京 : 新潮文庫)
Arthur Rimbaud, 小林秀雄 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地獄の季節, Une saison en Enfer(東京 : 岩波文庫)
Arthur Rimbaud, 中原中也 역, 「랭보 시집, ランボオ詩集, Poèmes de Arthur Rimbaud(東京 : 講談社文藝文庫)
Marcel Proust, 井上究一郞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失われた時を求めて,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전 10권(東京 : 筑摩文庫)
André Gide, 石川淳 역, 배덕자, 背徳者, L'immoraliste(東京 : 新潮文庫)
Jean Genet, 堀口大學 역, 「꽃의 노트르담,花のノートルダム, Notre-Dames des Fleurs(東京 : 新潮文庫)
Albert Camus, 窪田啓作 역, 이방인, 異邦人, L'etranger(東京 : 新潮文庫)
Françoise Sagan, 朝吹登水子 역, 슬픔이여 안녕, 悲しみよ こんにちは, Bonjour tristesse(東京 : 新潮文庫)
Agota Kristof, 堀茂樹 역, 「악동 일기, 悪童日記, Le grand cahier(東京 : 早川書房)
Milan Kundera, 菅野昭正 역, 불멸, 不滅, L'immortalité(東京 : 集英社文庫)
Marguerite Duras, 淸水徹 역, 연인, 愛人, L'amant(東京 : 河出文庫)
Jean-Philippe Toussaint, 野崎歡 역, 욕조, 浴室, La salle de bain​(東京 : 集英社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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