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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백 년 - 조선 문학과 일본의 근대

번역 백년

by trans2be 2022. 4. 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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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출처: 『飜譯百年』, 大修館書店, 2000, pp.215~236.

 

   
 

         목  차

Ⅰ. 조선 문학의 번역과 수용
Ⅱ. 조선 근대 문학의 번역
Ⅲ. 번역의 담당자
Ⅳ. 번역의 문제점
Ⅴ. 이문화의 번역

Ⅵ. 의미의 번역, 번역의 의미

 
三枝壽勝, 사에구사-도시카쓰
필자 사에구사 도시까스

Ⅰ. 조선 문학의 번역과 수용

  '조선 문학'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요, '한국 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특별히 국가를 지칭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하에서는 조선 문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일본에서의 (조선 문학-역자 주) 번역의 역사를 대충 더듬어 본 이후, 거기에 나타난 문제점이랄 만한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아주 먼 옛날의 조선의 이야기나 설화 등이 일본에 어떻게 수입되었던 것일까라는 것은 어떻든 간에, 조선에서 쓰인 것이 일본어로 번역 또는 번안되었던 것으로 비교적 오래된 것은 조선왕조 시대의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한문으로 된 것인데요, 작자는 매월당(梅月堂)이라는 호를 가진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라는 15세기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관해 말하자면 어릴 때에는 신동으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이쁨을 받습니다만, 그다음 대의 세조가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것에 반감을 느꼈는지, 방랑을 하며 일생을 마친 난세의 기인으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라는 책은 중국의 「전등 신화(剪燈新話)」를 모범으로 삼아 쓴 짧은 이야기를 모은 까닭에 일종의 괴담집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 책에 관해서는 당시의 문헌에 비평 글들이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 읽힌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후 조선에서는 작품이 은멸(隱滅)되어버리는 바람에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런데 이 책은 일본에서 에도시대에 화각본(和刻本), 그러니까 카에리 텐(返り点: 훈점-역자 주) 등을 붙인 목판본으로 출판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훈점(訓點)을 단 사람이 유명한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이라고 하지만, 훈점을 다는 모양새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의문이 남습니다.

  이 책은 메이지 시대에도 출판되고 있는데 조선에서 사라져 버린 책이 일본에서 전해져 오고 있던 것입니다. 이 책에는 원래 12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출판된 책에는 5 편 밖에 없습니다. 정말 작품이 더 있었는지는 더 알지 못합니다. 화각본은 번역은 아닙니다만, 번안을 통해 무대를 일본으로 바꾸기만 하여 고스란히 이 책 속의 작품을 사용한 이야기가 아사이 료이([浅井了意)가 쓴 「오토기보코(御)伽婢子」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까 「금오신화」에 훈점을 달았다고 하는 하야시 라잔에게도 「괴담 전서(怪談全書)」라는 선집이 있기도 하고, 한참 지난 뒤에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1734~1809)의 「우게쓰 이야기(雨月物語)」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에도시대에는 꽤나 괴담 물이 유행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1999년이 돼서 중국 다렌(大連) 도서관에 있는 「금오신화」가 16세기 조선에서 출판된 목판본임이 밝혀졌습니다. 수록된 작품 내용은 약간의 글자 차이를 제외하면 기존의 것과 같은데요, 권두에는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 내용이 다른 「매월당 선생전(梅月堂先生傳)」이 실려있다거나, 이 원본이 원래 마카세 쇼린(曲直瀬正淋:1565~1611)의 양안원(養安院: 쇼린의 원호(院號)-역자 주)이 수장하고 있던 장서였다가 오타니 코즈이(大谷光瑞:1876~1948)의 손을 거쳐 다렌 도서관에 전해지게 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나카라이-도스이, 半井桃水
나카라이 도스이

  한문이 아니라 조선어로 쓰인 작품이 번역된 것은 메이지 시기가 되어서부터입니다. 조선어 작품이라면 우선 근대 소설을 소개해야겠지만, 꽤 이른 시기에 나온 것은 근대 소설이 아니라 조선에서 구전 형태로 전해져 온 「춘향전」의 번역입니다. 번역자는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1861~1926)로 1882년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 23회에 걸쳐 삽화와 함께 연재되었습니다. 이 「춘향전」이라는 것은 원래 판소리라고 하는 일종의 구전 형태의 이야기로 전해왔던 것입니다. 무대는 조선 남부의 전라도 남원으로, 이곳에 수도로부터 파견되어 온 사또(郡主)의 아들 이몽룡과, 원래 기생이었던 월매의 딸인 춘향이라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몽룡은 장래의 과거 시험을 대비하여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년이었는데, 5월 5일 단오 절구(節句)에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놀러 나갔다가 거기서 만난 춘향과 깊은 사이가 됩니다.

春香傳, 춘향전, 아사히-신문
「계림정화(鶏林情話) 春香傳」 제1화(『朝日新聞』, 1882. 6. 25)

  그런데 그 소년의 부친이 다시 수도로 불려 가게 되어 가족도 함께 상경하게 되자, 몽룡은 춘향과 이별하게 되어버립니다. 뒤에 남겨진 춘향은 이후 부임해온 신임 사또의 수청을 강요받습니다만, 끝까지 이몽룡에 대한 지조를 지키며 신임 사또의 요구를 거부하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됩니다. 춘향이 이렇게 고난을 겪고 있는 사이, 수도로 돌아간 이몽룡은 학문에 매진하여 애쓴 보람이 결실을 보아 과거에 합격하고, 왕으로부터 암행어사라는 직을 임명받아 은밀하게 지방의 정치 시찰을 하는 역할을 띠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남원의 악덕한 사또를 응징하고 춘향을 구출하여 경사스럽게 하나가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한편, 이야기책으로서는 필사본이나 목판본 등으로 분량이나 내용이 다른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만, 큰 줄거리는 대체로 위와 같습니다. 나카라이 도스이가 번역한 것은 이 중 하나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춘향전」에 관해서는 다시 뒤에 다른 각도에서 한번 더 언급하겠습니다.

  이어서 이 「춘향전」과 같이 원래 판소리라 불리는 구전 이야기 형태로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는 것은 「춘향전」 이외에 「흥부전」, 「심청전」, 「토끼전」(「수궁가」)과 「적벽가」로 전부 다섯 편입니다. 판소리의 경우에는 제목이 「~전」이 아니라 「~가」라고 하는 데, 위에서 든 이름에도 이런 방식의 호칭이 섞여 있습니다. 「흥부전」은 일본의 「혀 잘린 참새(舌切り雀)」에 해당합니다. 등장인물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니라 형제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선량한 동생이 상처 입은 제비를 도와주자 그 제비가 보은을 하려 떨구어준 표주박에서 보물이 나오게 되어 유복하게 되자, 이를 부러워하여 따라한 심술궂은 형은 호되게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조선의 이 이야기는 몽골로부터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나카 우메키치(田中梅吉:1883~1975)와 김성율(金聲律)이 함께 번역한 「흥부전」으로 1929년 출판되는데요, 그 이전에도 일본에서 몇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심청전」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한 심청의 이야기입니다. 절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공양미를 얻기 위해 인신공양물로 바다에 몸을 던져 자신의 몸을 희생합니다. 심청의 효행에 감동한 옥황상제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거기에 더해 왕후가 된 이후 아버지와 재회하고, 아버지의 눈도 뜨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토끼전(또는 수궁가)」은 일본의 「해파리의 심부름(水母の使い)」이라는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용궁의 왕이 병이 나자, 이를 치료하는 데에는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토끼를 잡으러 가는 역할을 띠고 자라가 심부름꾼으로 파견됩니다. 이 자라의 관직이 주부(主簿)인 까닭에 이 이야기는 「별주부전(鼈主簿傳)」이라고도 불립니다. 결국 무지하고 경솔한 자라는 토끼를 데려오는 도중에 진짜 목적을 말해버리자,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꾀로 ‘간은 몸에서 꺼내 말리고 있으니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토끼가 하는 말을 믿은 자라는 다시 토끼를 육지로 돌려보내자 토끼는 그대로 냅다 달아나버리죠. 자라는 벌로 장(杖)을 맞아 등에 금이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1904년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1870~1933)가 편집한 「세계의 이야기(世界御伽噺)」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이인직이 번역하여 「용궁의 사자(龍宮の使者)」라는 제목으로 출판됩니다. 또 「적벽가」는 중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가운데 적벽 전투를 말하는데, 전투에 패하여 도망가는 조조가 매복하고 있던 관우와 마주치게 됩니다만, 너그러운 관우의 묵인 하에 죽임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삼국지연의」는 「수호전(水滸傳)」과 함께 조선에서 매우 선호되어 현재까지 계속 읽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들 가운데 「적벽가」를 제외하면 메이지 시기가 되고부터 일본에서 몇 번 번역이나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춘향전」은 다양한 형태로 소개되고 있어서 양적으로도 두드러집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조선을 대표하는 유명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조선의 문화나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다양한 면모(事象)를 「춘향전」은 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 작품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가 조선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으로 조선의 전통적 이야기에서 근대 문학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Ⅱ. 조선 근대 문학의 번역

  물론 번역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조선에서 번역에 알맞은 작품이 발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조선의 근대화라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그 성격에서는 약간 문제가 되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떻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후부터 일본 등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선구가 된 작품을 씀으로써 유명하게 된 사람은 앞서 소개한 「용궁의 사자」의 번역자 이인직입니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신문사에서 수습으로 일하면서 짧은 기사를 쓰기도 하고, 1902년에는 일본어로 「과부의 꿈(寡婦の夢)」이라는 단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귀국 후인 1906년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에 「혈의 누(血の淚)」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그 이후에도 「귀의 성(鬼の聲)」이라든가 「은세계(銀世界)」 등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소설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에 따른 풍속이나 사물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의 이야기 형식에 속하는 요소 역시 꽤나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병합되는 1910년 전후에는 이러한 종류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또는 신문 등의 연재물로 제법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근대 문학에 상응하는 최초의 작품이라 한다면 이로부터 꽤 뒤인 1917년에 이광수가 쓴 장편 「무정」을 들거나, 혹은 1919년부터 작품을 내놓는 김동인 등 일파의 작품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겠습니다. 이 가운데 「무정」은 문학만이 아니라 조선의 민족의식이나 민족 운동을 생각해보아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일본에서는 단행본으로 번역 출판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됐던 조선에서 근대적인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등장하는 것은 대개 1920년 전후라 할 수 있으니, 번역도 그 이후라야 겠지요.

  확실히 그렇게 보면 이 무렵부터 조선 문학의 번역이 잡지에 등장해야 할 터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는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건너와 있던 조선인이 상당히 많아서, 그들 자신이 일본에서 발표한 글이 수적으로는 더 두드러집니다. 민족의식을 지닌 그들은 당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인과 접촉하여 정신적인 유대를 맺고 있었기에, 그들의 주장을 호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이러한 발표 기관을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문학에 관계하는 다수는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소설이나 시를 일본어로 발표하는 조선인도 꽤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무정」의 작가 이광수도 처음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서 유학하고 있던 1909년에 습작 형태의 단편 「사랑인가(愛か)」를 쓰고요, 정치 활동을 하고 있던 정연규(鄭然圭)는 1910년대에 일본어로 쓴 작품집을 내놓고, 그 후 30년대에는 장혁주(張赫宙)가, 40년대에는 김사량(金史良)이 소설가로서 왕성한 활약을 시작합니다. 즉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에는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조선인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자신들 동포의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인에게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업적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일본인이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언어로 된 이질적인 문화권에 관심을 갖고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인이 주체가 되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이 자신들의 문화를 일본인에게 알리기 위해 행한 일이라고 하는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번역의 담당자라고 하는 점에서 조선 문학의 번역을 보면 예전 식민지 조선인과 독립한 이후 남북의 조선인은 목적이나 의식이 달랐을 것이고, 나아가 현재 재일 조선인과도 상당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식민지 시대의 번역이 일본인에게 무의미한 것이 아님은 당연하겠지요. 이 시대의 소설 번역은 거의 문학 관련 잡지에 게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 이러한 번역 작품이 단행본으로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나왔던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1940년에 신건(申建)이 번역한 「조선 소설 대표 작품집」, 장혁주가 편찬한 「조선 문학 선집」 전 3권, 이광수의 작품집인 「가실(嘉實)」, 「유정(有情)」, 장편 「사랑(上)」이 출판되고, 이듬해(1941)에는 이광수의 「사랑(하)」, 이태준의 작품집 「복덕방」이 연이어 나옵니다. 시집으로는 김소운의 번역 시집 「우윳빛 구름 」이 나온 것도 1940년이고, 번역은 아닙니다만 김사량의 작품집 「빛 속으로」와 「고향」이 나온 것이 41년과 42년입니다.
  번역된 소설의 작가를 보면 김남천, 이기영, 이효석, 유진오, 채만식, 박태원, 김동리, 최명익(崔明翊), 김동인, 이광수, 이상, 이태준, 강경애, 한설야, 최정희, 염상섭, 이석훈(李石薰), 김사량과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중요 작가가 선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번역은 일본 식민지 통치 말기, 전쟁 말기의 위기 상황 하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대륙에서 일본이 벌인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고, 미국과도 막 전쟁 상태에 돌입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출판물은 물론 이러한 전쟁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요. 사실 이런 번역 작품이 나온 이후 발표된 조선의 작품집은 처음부터 일본어로 된 것이었고, 더구나 내용 역시 전쟁 시기에 부응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갑니다. 예외로는 1942년에 연달아 나온 번역 시집, 즉 김종한(金鍾漢) 번역 「백운집(白雲集)」, 김소운 번역 「조선 시집-전기」, 「조선 시집-중기」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겨우 2년 사이에 당시 조선 문학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 선정되어 잇달아 번역 출판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인이 느꼈던 위기의식의 산물이었을까요. 단 이광수나 이태준 작품의 번역 출판은 일본인이 주도하여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 시기 민족적인 위기의식만으로 조선인이 이러한 번역을 내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출판된 당시는 일본에서 조선이나 만주가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일본이 펼치고 있던 대륙에서의 전쟁과 대륙 관련 정책에 대해서 일본인의 관심이 향해 있었다고 하는 사정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조건이 아무리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경제적 조건 없이는 출판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대륙에서의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진행된 인플레이션 경향이 단기간이긴 하지만 당시 호황을 떠받치고 있었다고 하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때마침 겹쳤던 것이 식민지 시대의 출판을 지탱하여 문학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함과 동시에, 이러한 번역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상황 자체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만, 부정적인 상황에서 나온 결과가 꼭 그 상황에 맞춰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주목해도 좋다고 봅니다.


  이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창작도 번역도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떨어집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조선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혼란이 계속되는데요, 이 와중에 문학은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번역이 이루어지는데요, 제2차 대전 이후의 세계정세를 반영해서인지 패전 후부터 조선 전쟁(한국전쟁-역자 주) 이후까지 일본에 소개된 작품은 거의 38선 이북의 것으로, 한국의 작품은 거의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미 나온 번역 작품의 재발행은 별도로 하고 새로 번역된 작품은 전부 북쪽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단행본으로는 이기영(李箕永)의 「되살아나는 대지(원제 「땅」)」(1951, 김달수 · 박원준 공역), 한설야의 「대동강」(1955, 이은식 역)과 「역사」(1960, 이은식 역) 등은 당시 북의 중심적인 작가의 작품으로, 이들 내용은 행방 이후 북의 토지 정책, 조선 전쟁과 관련한 것 또는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60년대입니다. 1965년 일본과 한국이 국교를 맺어 상호 교류가 시작되기 전후부터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품도 소개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출판된 단행본의 발행으로 말한다면 그 이후의 번역 소개의 수량은 상당한 양이 되었고, 내용도 다양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이 백 년 간의 번역의 역사를 조망해보면 일본에서의 조선 문학 수용의 특색이랄까, 문제점이 어슴푸레하게 떠오릅니다. 우선 특정 시기에 꽤 집중적으로 많은 작품이 번역되는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1940년~1941년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번역자는 조선인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정점은 1970년대 중반부터 후반입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의 정치가 꽤나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어서, 일본 신문에서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던 시기로, 이 시기 번역의 대상이 된 작품은 한국의 것도 있었지만 북의 것도 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은 마침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것이기에 역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때입니다. 이 무렵까지는 상당히 정치적 ‧ 사회적 상황에 의한 관심에 따라 출판이 좌우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단행본의 숫자로 말한다면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 무렵부터 번역 종수는 매년 상당한 수가 되기에 이르지요. 하지만 번역 대상이 되는 작품은 종래와는 달리 매우 폭이 넓어지게 됩니다. 즉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번역 대상은 기존에는 문학 작품으로 보지 않았던 한국 국내에서의 베스트셀러 등의 책들이 증가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번역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는 점은 다양한 관심에 부응할 수 있을 만큼 번역자가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그만큼 조선어를 배운 일본인이 증가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Ⅲ. 번역의 담당자

  그러면 이제까지 언급한 번역의 담당자, 즉 번역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번역을 살펴보면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일본인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비교적 새로운 1965년 경부터라는 점입니다. 물론 식민지 시대에도 번역자로 일본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조선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춘향전」을 처음 번역한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나 문학 연구자였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조선어가 훌륭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는 예외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번역 작품에서 번역자로서 일본인의 이름이 있을 때에는 대개 동시에 조선인의 이름이 함께 기재되어 있거나, 본문 가운데 조선인의 도움을 받았음이 적혀 있습니다. 즉 번역을 할 때 우선 조선인이 일본어로 초벌 번역을 하고 나면 이를 일본인이 윤문을 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외국어의 경우에는 상당히 일찍부터 일본인이 그 외국어를 배워 번역을 해왔던 것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조선어의 경우에는 일본어에 서툰 조선인과 조선어에 서툰 일본인의 공동 번역이라는 형태가 오랜 기간 이어져 와서, 그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컨대 집단 번역이라 할 수 있는 형태가 현재에도 다수 보이고 있습니다. 즉 번역 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자신이 행한 번역에 대하여 개인으로서 번역자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구조에서, 조선어의 경우에는 여타 외국어와는 좀 다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어 습득에 신경을 쓴 사람은 언어학자나, 일본어 학자 그리고 고전 문학자와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다면 경찰이 중심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동시대에 문학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은 별 쓸모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인 1939년 히노 아시헤이(火野草平, 1907~1960)의 「보리와 군대(麦と兵隊)」(1938)를 조선어로 번역한 니시무라 신이치로(西村眞一郞)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문학자가 아니라 총독부 번역관이었습니다.


 

윤복이의-일기, 저하늘에도-슬픔이
「윤복이의 일기」(太平出版社, 1965)의 표제 삽화

  일본인에 의해 조선어 작품 번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쓰카모토 이사오(塚本勳)가 이윤복(李潤福)의 「윤복이의 일기」를 번역 출간한 1965년에서의 일입니다. 이는 소설이 아닌 수기였고요, 문학 작품으로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가 번역한 윤세중(尹世重, 1912~1965)의 아동 문학 작품 「붉은 신호탄」이 1967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1970년부터 「조선 문학-소개와 연구」라는 계간지를 12권까지 발행한 일본인 중심의 연구 그룹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번역집 「조선 문학선(朝鮮文學選)」 2권이 1973년부터 74년에 걸쳐 나왔습니다. 점차 일본인에 의한 연구와 번역이 본격화 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일본인의 한국 유학이 왕성해지는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즉 일본인에 의한 조선 문학의 번역의 역사라는 것은 매우 새로운 것입니다. 이후 일본인 연구자들의 편찬 ‧ 번역으로는 제가 관계했던 것만으로도 식민지 시대 소설집인 「조선 단편 선집」이나 한국 소설집인 「한국 단편 선집」 그리고 현대 한국 여성 문학 선집인 「겨울의 환-한국 여성 작가 작품집」 등이 나오긴 합니다. 이것들이 반드시 수준이 높다거나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일본인이 조선 문학에서 무언가 골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시도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얼마쯤은 있다 한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문학에 관한 한, 일본인이 외국 문학으로서 수용한 조선 문학 작품을 독자적으로 선택하여 번역 출판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적다고 하는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합니다. 현재에는 일본인, 조선인, 재일 조선인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번역이 있기는 있습니다. 본국의 조선인이나 재일 조선인이 왜 번역을 하는가, 그 동기나 목적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하고, 일본인에 의한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지금까지 번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Ⅳ. 번역의 문제점

  지금까지 번역된 조선의 책이 상당한 양에 이르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와 함께 조선과 관련한 지식도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일본어로 된 문헌만으로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관한 이해라는 관심의 양상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이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조선 이외에 다른 나라들도 포함하여 일본인이 이질적인 문화에 드러내는 관심의 양상은 일반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여기서는 조선 문학의 번역에 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북에서 출판된 작품 가운데에는 각각의 본토에서 많이 읽힌 것도 있습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를 일본에서 출판하면 잘 팔릴까요.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그 지역 다수의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 지역 사람들의 기질이나 감수성과 딱 들어맞는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원인을 생각할 수 있기에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상대방에게 잘 팔리고 있는 것이 일본에서도 히트를 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는 없는 듯합니다. 왜일까요? 물론 일본에서 화제가 된 것도 있습니다. 한국 정치에 관한 것이라던가, 섹스에 관한 금서와 같은 종류의 것은 있습니다. 그런 것은 본국에서 다수의 독자에게 환영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화제성이 있는 것입니다. 일본과 조선에서는 독자의 기호를 받치는 기초에 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독자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점은 번역자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번역 방식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문화권과의 차이에 관한 점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춘향전」을 들어 이야기해보지요. 줄거리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입니다만, 사실 원문으로 읽거나 판소리를 들을 때에는 언뜻 보기에 매우 뒤죽박죽인 곳이 많다고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슬픈 장면임이 분명한 곳에 외설스런 농담이 나온다거나, 이야기 줄거리와 관계가 없는 일을 계속 이야기한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일반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것이 지금까지 조선에서 매우 사랑받아 정착해 있다는 점은 그러한 분위기 자체, 이야기 방식 자체가 독자나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춘향전」은 독특한 유머가 인상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단순히 젊은 남녀의 연애와 고난에 이은 해피 엔딩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이 춘향의 수난으로 , 이몽룡을 원망하는 듯했던 춘향의 모친 월매가 마지막이 되자 이런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역시 아이를 가지려면 딸이 좋다는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천연덕스러운 태도 하나에도 이 땅의 문화 자체에 걸쳐 있는 낙천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에 몇 번이나 소개되었던 「춘향전」은 상당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그다지 전달되지 않을 듯싶은데요. 물론 말이 달라서 원문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유머라는 것은 꽤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뿐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번안된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의 심각한 번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거나, 별개로 당시 사회의 모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원작에서는 이들을 둘러싸고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으로 혼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번역에서는 이러한 원작을 즐기는 데 있어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부분을 깡그리 없애버리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저에게는 이러한 생뚱맞음에 의한 유머가 현재의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흐르고 있는 어떤 전통적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죠.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문체에서 오는 인상입니다. 어느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 의외의 느낌이 든 적이 있습니다. 아, 저쪽에도 일본 문학과 똑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죠. 만약 거기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원문으로 읽는다고 할 때, 역시나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역시 이것(조선의 문학 작품-역자 주)은 저쪽의 작품인 것이지요. 번역으로 읽을 때에는 완전히 일본 문학 작품의 분위기가 돌지만, 원문으로 읽게 되면 역시나 분위기는 조선의 문학인 것입니다. 이는 「춘향전」에 대해 말했던 것과 통합니다. 어쩌면 일본에서 독자를 얻기 위해서는 일본 독자에게 읽힐만한 문체로 번역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일본 문학 작품처럼 이질감 없이 번역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도 일본 문학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더 앞서 있다고 하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러한 번역을 통해 조선에도 일본 수준에 달하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뒤에는 이런 것 이외에 조선 문학의 특색을 찾는다고 하는 과제만이 남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그러한 생각에서 번역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에는 그럴 필요가 없지요. 아니 그렇기는커녕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원문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제가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단정할 만큼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는 한 정돈된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로서는 원문 속에 있는 일본인에게는 터무니없고 우스운 묘사도 포함해서 독특한 가치를 옮기고 싶은 곳이 있을지라도,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난잡하게 된다며 무시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역으로 생각해 봐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도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도 요시모토 바나나(吉本 バナナ)도 외국어로 번역될 때 똑같은 느낌을 주는 동일한 문체로 번역되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혹시 원문을 낳은 세계에 대한 몰이해로 이끌지는 않을까요? 이는 단순히 각각의 작가가 지닌 특색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 만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Ⅴ. 이문화의 번역

  번역 방식에는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일본어로 거부감 없이 읽기 좋게 하는 것이라면 좋은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앞서 드린 말씀은 상당히 한정된 범위에서의 문제일지도 모르지요. 한정된 것이라는 말은 이질적인 문화권의 작품을 번역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인으로서 외국 문학을 접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어려운 것은 질색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좋습니다. 외국 문학을 접할 때에 이질적인 문화권이 낳은 그 문화의 독자성에 주목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 문학으로서 시대의 최첨단의 문학을 생각해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시대의 최첨단은 문학이나 음악에서도 세계 속에 언제나 공통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자성에 주목하면 공통으로 통할 수 있는 형태로 해보려 해도 되지 않는 한계 쪽에 초점을 맞추는 셈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라면 매끈하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보다 언뜻 보았을 때 위화감이 느껴지는 요소가 아주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문화의 이질성에 있어서 이 위화감의 존재가 열쇠인 셈입니다. 완전히 일본 문학으로 만들어버리는 번역은 그 이질성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를 일본과 동질적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세계는 자신과 같아야 한다, 통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나와 같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와 같은 발상이 떠오르겠지요. 이런 식이라면 이질적인 발상법을 가진 사람들끼리 생각이 어긋날 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조차 없애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문체 문제는 다루었으니 말의 측면에서 생각해봅시다. 조선어라는 것은 일본어와 상당히 비슷한 언어라고 하지요. 확실히 단어를 만드는 것 또는 글을 짓는 데에서의 어법상의 구조는 상당히 일본어와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실제 발음은 매우 달라서요, 문장을 읽거나 대화할 때에 일본인이 바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말의 구조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은 번역에서 다른 언어와는 매우 상황이 다르다고 봅니다. 예컨대 조선어로 다양한 표현을 할 경우, 이들 표현 간의 차이는 제법 일본어와 대응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로 “저는 고양이입니다”, “제가 고양이예요”, “저는 고양이라고 합니다”, “내가 고양이다”, “내가 고양이라고” 등의 차이가 조선어로도 똑같이 대응하는 요소의 차이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차이가 의미하는 것이 두 언어 간에 서로 같다고 하는 보증은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그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조선어의 번역에서는 의역할 것인가 아니면 직역할 것인지와 같은 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두 언어의 구조적 유사성을 무시하고 번역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는 일본어를 조선어로, 또는 역으로 번역한 실례를 보면 원문이 지니고 있던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나 문투가 완전히 사라져서 지나치게 말끔한 번역문으로 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여간 번역이라는 게 원문과 달라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언어 간의 구조적 유사성을 무시하고는, 번역은 일본어로 자연스러워야만 한다거나 번역은 일본어로 읽기 쉽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어차피 번역이라는 것이 번역자에 의한 창작이기 때문에 번역이 번역자의 문체로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래도 괜찮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드리는 말씀은 어떤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작품을 가능한 한 원문에 있는 요소를 번역문에도 반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본어와 조선어의 다양한 어투 간의 뉘앙스 차이는 많은 경우에 대응하는 구조에서 정밀한 독해를 통하여 옮겨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어와 일본어에서는 일반적 표현과 달리 약간 예스러운 문체나, 동시대일지라도 표준어가 아닌 속된 표현이나 사투리 표현 간의 차이가 마찬가지로 대응하는 요소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즉 이러한 차이는 서로 뉘앙스가 다른 표현으로 번역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가능하다 해도 실제로는 항상 간단할 수만은 없습니다. 예컨대 표준적인 수도의 말과 다른 방언을 각각 어느 지방의 방언에 대응시킬 것인지 등의 문제는 무의미하고요, 의고적 말투를 서로 조건이 다른 과거 어느 시대의 표현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표현은 단순히 표준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 표준과의 차이를 다른 언어의 경우와 비교해서 구조적으로 알아채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어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우선 생각해보아야 할 출발점은 직역이 아닐까 하는데요, 어떠신지요? 그렇다면 일본어로 읽지 말라는 말이냐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Ⅵ. 의미의 번역, 번역의 의미

  원래 번역이란 게 일본어로 읽기 쉽게 하는 것, 나아가 아름다운 일본어로 문장을 바꾸는 것이라는 발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제가 한 번 멋대로 추측해보면 이는 메이지 이후에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온 일본인의 후진국 의식이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밖에 없습니다. 동경하는 대상, 지향해야 할 목표인 서양의 것은 모두 일본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 그것은 품질이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번역 역시 가장 최고 수준의 문체로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번역된 작품이 높은 이상적 세계의 것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겠지요. 이상 세계를 묘사하는 언어로 옮길 수 있다면 현실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할지 싶네요. 대상을 어떻게 충실하게 전달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만들 것인지의 문제라면 이편이 좋을 겁니다. 일본에서 예전부터 번역자의 이름을 크게 써넣어 온 이유도 여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이질적 문화권에서 나온 산물을 이해한다기보다, 그런 대상을 이용하여 항상 원작자와 일체감을 줄 수 있는 번역자를 유명하게 하는 쪽으로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거창해지고 말았네요. 그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언어란 어떤 것일까요? 물론 일반적인 답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조선어를 주제로 하고 있지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조선어는 상당히 일본어와 구조적 대응성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컨대 문장의 문법적 요소를 그대로 대응하는 일본어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이 얼음이 되었습니다(水が氷なりました, 올바른 일본어 문장은 水が氷なりました)”, “비가 오기 전에 가야만 해(雨が來ること前に行ってこそなるぞ, 올바른 일본어 문장은 雨が降ること前に行ってこそなるぞ-역자 주)”와 같은 경우 말입니다. 이러면 아주 악취미가 될지도 모르고, 문법적인 오해도 작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전혀 못 알아먹겠다고도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최근 이와 비슷한 것을 시도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작가 가운데 채만식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탁류(濁流)」라는 장편이 있습니다. 내용은 어느 여자가 이기적인 부모에게 희생당해 남자들의 놀잇감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살인을 범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좋아한다는 독자도 상당히 많습니다. 번역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점은 주인공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그 문체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 소설은 흡사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요설적(饒舌的)인 이야기의 어조가 두드러집니다. 대개는 이러한 문체는 문장을 만드는 데에는 낙제일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는 매력이 되어서 줄거리의 단순함을 상당히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이야기 어조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잘 다듬은 일본어로 번역한다면 별 의미가 없는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 겁니다. 여기서 저는 조선어와 일본어의 구조적 유사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취미에 가까운 번역을 시도했었습니다. 이질적인 문화권이 낳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색을 가능한 한 살려서 소개하는 것은 약간은 일본어를 어지럽혀도 괜찮다는 기분이었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위화감을 주는 것으로 이질성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적인 제약도 있습니다만 실은 이 작업에서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곤란한 문제와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탁류가 작가에 의해 매우 꾸밈없고 친근한 대화 형태의 문체로 쓰여있다는 것, 그 안에서 용어의 사용법 역시 그러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체적 장애에 관한 단어는 현재 일본에서 부적절한 표현인 것도 있고, 작품 속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바꿔서 표현할 수 없을 때에는 완전히 번역문에서 삭제되어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죠. 저로서는 작품 자체는 일본의 것이 아니고 내용도 말의 사용도 조선 사회의 것인 데다, 현재 한국에서는 여전히 허용되고 있으니까 이런 것도 포함해서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본래의 번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의 시도가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는지 명확히 할 수 없지만, 이제라도 조선어의 번역에 관해 다양한 시도와 논의가 이루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느낌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참고문헌】

◆ 각종 번역의 실례와 목록에 관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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