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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백 년 - 독일 문학과 일본의 근대

번역 백년

by trans2be 2022. 3. 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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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타니가와 미치코(谷川道子)
출처: 『飜譯百年』, 大修館書店, 2000, pp.34~48.

   
 

         목  차

Ⅰ. 독일 연극 수용의 역사
Ⅱ. 전후 연극과 브레히트의 수용
Ⅲ. 브레히트의 '안티고네' 번역과 공연
Ⅳ. 하이너 뮐러의 현대 연극에서의 위상

 

谷川道子, Tanigawa Michiko, 타니가와 미치코
저자 타니가와 미치코

  이 공개강좌에서 '독일 문학을 번역한다'라는 저의 담당 역할에 조금은 명분과 실질이 다른,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염려가 있는데요. 저의 전문 분야는 독일 연극인지라 오늘은 '독일 희곡을 번역한다'로 바꾸어, 독일 연극의 일본에서의 번역과 수용을 중심으로 그 역사와 현재, 그리고 번역에 관한 저 자신과의 관계, 희곡 번역의 특성이나 문제점 같은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Ⅰ. 독일 연극 수용의 역사

  메이지(明治) 이후 일본 연극사에 있어 독일 연극이 거둔 성과와 역할은 실로 대단해서, 이를 모두 말씀드리면 그것만으로 시간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일단은 메이지 초기, 다이쇼(大正) 중반, 전전, 전후 이렇게 네 시기로 나누어 간결하게 정리한 것을 자료로 나누어 드렸습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극장의 일본 공연 시기의 상연 팸플릿에 씌어 있는 문장인데요, 자료를 보면서 우선 ‘달음박질치듯 서둘러’ 소개하렵니다.

  제1기는 메이지 초기인데요, 일본에 최초로 들어온 독일의 번역물은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그것도 그의 「빌헬름 텔 Wilhelm Tell」입니다. 1880년(메이지 13)에 출간된 사이토 테쓰타로(齋藤鐵太郞)의 스위스 독립 자유의 궁현(瑞西獨立自由ノ弓弦)이 바로 최초의 빌헬름 텔인데, 원래 20책으로 분책하여 발행될 예정이 첫 분책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만, 이 빌헬름 텔은 1890년까지 세 종류가 더 번역이 나옵니다. 자유의 선구(自由ノ魁), 텔 자유담(哲爾自由譚), 텔 자유의 화살 하나(哲爾自由ノ一箭)-그러나 이 번역물들은 오히려 「소년 문무(少年文武)」와 같은 (아동-역자 주) 잡지에 게재된 모노가타리(物語) 형식의 부분적인 번안입니다. 원작은 쉴러가 1802년에 쓴 희곡 작품으로, 스위스 민중이 악한 대관(代官)에 대항하여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며 싸운다고 하는, 빌헬름 텔이란 전설적인 인물을 배치하여 자식의 머리에 올려놓은 사과를 화살로 쏘아 맞추면 인정해주겠다고 하자 멋지게 맞추는 이 정도까지가 일본에서는 유명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번역의 모든 제목에 '자유'라는 단어로 수식하고 있듯이 실은 자유민권 운동의 기운 속에서 소개 ·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기쯤에 쉴러의 마리아 슈트아르트(메어리 스튜어트)도 수용되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간의 대치 국면을 묘사한 희곡인데. 이는 1883년 막부 말기에 통역원으로 유럽에 건너가 귀국 이후에 신문 기자가 되었던 후쿠치 오우치(福地櫻痴, 1841~1906)의 번역으로, 「하루노 유키 메리 고사이고(春雪馬利御最期)라는 제목으로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영역본의 중역(重譯)으로 희곡을 옮기려 했었지만, 2막부터는 대략적인 줄거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오우치의 관심은 그러나 자유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부키(歌舞伎)의 개량에 있었죠. 유럽을 방문하면 반드시 연극을 주의해서 보리라, 일본에도 그처럼 손님에게 내보일 연극이 필요하다고 하는 서구적 개량화의 풍조 속에서, 1886년에는 후쿠치 오우치나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 1855~1920) 등에 의해 관계(官界) 및 극계의 합동으로 ≪연극 개량회≫를 발족합니다. 메이지 초기의 연극이라는 것이 가부키와 별반 다르지 않아, 가부키를 근대적으로 개량하려는 시도 역시 여러모로 실시되었죠. 예컨대 잔기리모노(散切物)라고 해서 상투를 자른 것, 역사적 소재를 사용한 가츠레키모노(活歷物), 서양 문학의 번안 물 혹은 외국인과의 합동극(合同劇) 등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결국엔 결실을 맺지 못하고 서구화 열풍도 퇴색하여, 가부키는 메이지 20년(1888) 초 천황의 관람을 계기로 「고상한 예술」로서 쇼치쿠(松竹)나 도호(東寶)의 자본에 의해 전폭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역으로 이에 의해 현재까지 그대로 전승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쉴러의 이 빌헬름 텔마리아 슈트아르트 Maria stuart 의 수용에 나타난 대극성(對極性)은 이 시기 일본의 사상적 상황을 상징하고도 있습니다. 자유민권도 운동 속에서 정치를 연극에 결부시켜보려 했는데, 스도 사다노리(角藤定憲)라는 장사(壯士-자유민권 운동 참여자에 대한 일반적 총칭. 참고로 사다노리는 자유당의 장사였으며, 나카에 초민이 발행하고 있던 「시노노메 신문(東雲新聞)의 기자였음-역자 주)가 <일본 개조 연극(日本改造演劇)>이란 이름을 걸고 일을 벌였고, 이어서 ‘자유 동자(自由童子)’라는 이명(異名)으로 가와카미 오토지로(川上音二郞)가 「이타가키군 조난 실기(板垣君遭難実記)」나 옷페케페후시(オッペケペー節: 가와카미 오토지로가 유행시킨 자유민권 운동의 노래로, 당시 메이지 관료나 지도자를 풍자한 노래-역자 주) 등으로 융성의 극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신파극의 개막 이기도한데요, 이런 장사극(壮士劇)에는 빌헬름 텔」과 같은 쉴러 등의 서양물의 상연은 없었습니다. 빌헬름 텔의 초연은 메이지 38년(1905) 메이지좌(明治座)에서 이치카와 사단지(市川左団次, 1880~1940)가 연기하고 이와야 사자나미(嚴谷小波, 1870~1933)가 번안한 스위스 의민전(瑞西義民傳)으로, 자유민권보다도 가부키 연극적 관심에서 공연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쉴러 및 독일 작품의 일본 최초의 공연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도쿄 제국대학의 「제국 문학(帝國文學)」이 쉴러 사후 100주년 기념호를 낸다거나, 빌헬름 텔 완역본이 간행되거나, 혹은 유학에서 돌아온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가 쉴러전이란 평전을 쓰는 등 학자, 문인에 의한 본격적인 소개, 번역, 연구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구로부터 희곡과 연극이론이 존재함을 알리며 '연극의 근대화는 구극 구파(舊劇舊派)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완전한 쇄신'을 주장했는데, 와세다대학 영문학 교수였던 쓰보우치 소요(坪內逍遙, 1859~1935), 또 다른 한 명이 4년 간의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모리 오가이였습니다. 이로부터 제2기가 시작합니다.


   1906년 소요는 섹스피어를 중심으로 제자인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 1871~1918)와 함께 ≪문예협회≫를 꾸리는데요, 초심자를 배우로 키워내는 교육도 시작해서 여배우 마쓰이 스마코(松井須磨子, 1886~1918)도 여기서 배출됩니다. 그러나 호게쓰는 원래 대중적인 연극을 하고 싶어 했고, 스마코와의 연애 문제도 있어 소요와 결별하고, 게주츠좌((藝術座) 현재의 도호(東寶))를 만들어 스마코와 함께 독일 자연주의 작가인 헤르만 주더만(Hermann Sudermann, 1857~1928)의 고향 Heimat이나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인형의 집 Et Dukkehjem󰡕, 또는 알고 계신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晋平, 1887~1952)의 「카츄샤의 노래」 등과 같은 극가(劇歌)를 삽입한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공연합니다. 평판을 얻어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예술의 두 요소를 아우르는 길을 지속적으로 모색해가려 했으나, 1918년 호게쓰의 사망 이후, 스마코도 그를 따라 자살해버립니다. 최근 연극 제작 단체인 치진회(地人會, 1981년 설립)가 이 호게쓰와 스마코의 이야기를 다룬 사이토 렌(齋藤憐)의 희곡 초연(初戀)을 다시 공연했었죠. 

小山內薰&#44; 오사나이-카오루
오사나이 카오루

  다른 한편 오가이도 일본에 독일 희곡의 본격적 소개가 필요하다면서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2~1781),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 베데킨트(Frank Wedekind, 1864~1918) 작품에 대한 왕성한 번역 활동을 시작합니다. 오가이 전집에서도 이 독일 희곡의 번역이 점하는 양은 상당합니다. 그는 독일 문학을 일본에 최초로 소개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가이의 조언을 받아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內薰, 1881~1928)가 가부기계의 이치카와 사단지와 손을 잡고 1909년 설립한 것이 <자유극장(Théâtre Libre)>입니다. ‘자유극장’은 19세기 후반 졸라(Emile Zola, 1849~1902)를 필두로 한 자연주의의 발생지인 파리에서 앙드레 앙투안(André Antoine, 1858~1943)에 의해 시작되어, 베를린이나 더블린 또 모스크바 예술극장까지 이어졌던 전 유럽을 석권한 일대 연극 혁신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형 극장 운동이었던 독일의 자유 극장을 모범으로 삼아 오사나이는 일본에서도 이러한 자유 극장(운동)을, 그리고 '진정한 번역극의 시대를 일으키고 싶다'면서 쓰보우치 소요와는 반대로 비전문 배우를 대신해 이치카와 사단지 등 구파 배우와 작업하는 형태로 입센이나 하우프트만, 또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마테를 링크(Maurice P. M. B. Maeterlinck, 1862~1949)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립니다. 1919년 사단지가 쇼치쿠의 전속 배우가 되면서 끝을 맺게 되지만 말이죠.

  이러한 근대극의 소개 활동은 일본의 새로운 연극(=신극)의 기점이 될 뿐만 아니라,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남편과 자식을 두고 집을 나오는 주인공 노라를 둘러싸고 히라쓰카 라이쵸(平塚雷鳥, 혹은 히라츠카 라이테우, 1886~1971) 등 ≪세이토사(靑鞜社)≫를 중심으로 커다란 논쟁이 지속되었듯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사상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연극 수용에 있어 그 다음인 제3기는 '쓰키지(築地) 소극장'에서 비롯됩니다. 연극 공부를 하기 위해 유럽에 유학 중이던 히지카타 요시(土方与志, 1898~1959)가, 그는 백작 가문(그의 조부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가 백작의 작위를 받음-역자 주)의 자제였는데요,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의 문화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베를린에서 듣고 그의 학비로 도쿄에 극장을 세우기 위해 귀국합니다. 1924년(다이쇼 12) 목조 건물로 4백여 객석과 본격적인 쿠펠 호리존트(Kuppelhorijont: 안쪽으로 약간 굽은 형태의 무대 배경 벽-역자 주)의 무대 장치를 갖추고, 연구생을 모집하여 배우 교육을 통해 동인 제도를 구축한, 일본 최초의 유형 극장 극단의 탄생입니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이 창립되었던, 브레히트의 출생 연도와 같은 해인 1898년에 태어난 히사모토는 이때 약관 26세였습니다. 극장 담당자 대다수도 20대의 청년 세대로 진용을 꾸리고, 스무 살 위인 오사나이 카오루를 고문으로 맞아 시작한 이 키지 소극장은, 첫 2년 간은 ‘서양물’만을 공연하기로 선언합니다. 이 때문에 당시 성장하는 극작가들에게 일제히 반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쓰키지(소극장)에는 매번 빠짐없이" 갔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일본 작품을 공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 비난이 있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외국물을 공연함으로써 (국내 창작자들로 하여금-역자 주) 공연을 올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하여 창작극이 나오게 하기 위한  "자극을 주기만 해도 좋다"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Tsukiji-shoigekijo&#44; 쓰키지-소극장-poster
1924년 쓰키지 소극장 제1회 공연 포스터

  그 가운데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오사나이의 체호프나 마테를 링크의 근대극 노선이 아닌, 히지카타의 독일 연극 공연이었습니다. 그것은 개막 공연에서 관객의 열광이 전적으로 오사나이 연출의 체호프 작 백조의 노래가 아니라, 히지카타가 연출한 괴링(Reinhard Göring, 1887~1936)의 해전 Die Seeschlacht을 향해 있었다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이 작품은 1919년 발표된 독일 표현주의 연극입니다. 1910~20년대라는 것은 유럽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아방가르드 예술 경향이 움트고 있던 시기인데요, 프랑스의 쉬르레알리슴(surréalisme)이나 큐비즘(cubism), 스위스의 다다이즘(dadaism), 이탈리아의 미래파(futurismo) 또 러시아 아방가르드, 그리고 이른바 독일판 표현주의에 의거 연극계에서는 여러 희곡만이 아니라 유명한 연출가도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 예스너(Leopold Jessner, 1878~1945), 피스카토어(Erwin Piscator, 1893~1966), 러시아의 메이에르홀트(Vseol'd Emil'evich Meierkhol'd, 1874~1940)가 바로 이들입니다. 히지카타는 실제로 유럽에서 그러한 연극을 보고 이를 일본 무대로 옮겨 바꿔보려 한 것이죠. 이런 시도 역시 일본 연극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키지 소극장의 시대는 오사나이 사망 이후 1929년에 분열하며 막을 내리지만, 일본 신극 역사에 있어 전설적인 시기라 일컬어집니다. 겨우 5년 정도의 기간에 117개의 작품을 공연했는데, 일본 작품은 27개에 불과했습니다. 아울러 다이쇼기까지 번역된 독일 연극은 33명의 작가, 110편의 작품이었으며, 그 가운데 공연된 것은 21명 · 45편의 작품이었습니다. 번역된 프랑스 희곡의 경우 16명의 작가, 45편의 작품이었으며 그 가운데 공연된 것은 19명 · 26편의 작품이었습니다. 이를 비교해보면 독일 연극이 성취한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점이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이 키지 소극장에는 독일과 관련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예컨대 1924년 알려지게 된 카이저(Georg Kaiser, 1878~1945)의 아침부터 밤까지 Von Morgens bis Mitternachts의 무대 장치를 만든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 1901~1977)도 독일 표현주의의 다른 희곡을 여럿 번역했는데, 히지카타와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유학했습니다. 실제로는 미술가로서 많은 그림을 그리고 귀국, 일본에 아방가르드 미술을 정력적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즘 「아구리」라는 TV 소설이 있지요? '일본의 다다이스트' 요시유키 에이스케(吉行 エイスケ, 1906~1940)와 친구이자 그의 처인 아구리가 기괴한 분위기의 미용실을 차렸는데, 그 미용실을 설계한 사람도 무라야마 토모요시였습니다. 일본에서 드믄 단발머리를 한 남자로서도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 이른바 모보 · 모가(모던 보이와 모던 걸-역자 주)의 풍조, 다이쇼 모더니즘의 조류에 편승했던 것이 쓰키지 소극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더니즘을 유럽과 동시대적으로 공유했으니까요.


 

千田是也&#44; 센다-코레야
센다 코레야

  또 한 명이 센다 코레야(千田是也, 본명은 이토 쿠니오(伊藤圀夫), 1904~1994)입니다. 그는 간토 대지진 당시 도쿄 센다가야(千駄ケ谷)를 걷고 있다가 코리아, 즉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아 폭행 · 연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센다가야의 코레아’라는 뜻으로 예명을 센다 코레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키지 소극장에서 일했는데, 2년간 해전이나 아침부터 밤까지 등의 번역극에서 26개의 배역을 연기했습니다. 이후 1927년에는 연극 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나죠. 이 당시 독일은 경제 공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넘치고, 나치와 사민당 그리고 공산당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노동자 연극 등도 활발하던 시절이었던지라 적극적으로 이런 연극에도 참여합니다. 이 사람도 대단한 인물인데, 돈벌이로 도쿠나가 스나오(德永直, 1899~1958)의 소설 태양 없는 거리(太陽のない街) 등을 독일어로 번역합니다. 언젠가 독일에서 도서관을 살펴보다 아무렇지 않게 서가에 꽂혀 있어 퍽 놀랐습니다. 엑스트라로 연극이나 영화에 출연하면서 4년 반 동안 독일에 머물다 독일인 아내를 데리고 귀국합니다. 일본에서도 노동자 연극에 참여하는 한편 아사쿠사(淺草)의 ‘에노켄(배우, 가수 등으로 활동하던 에노모토 켄이치(榎本健一, 1904~1970)의 애칭-역자 주)’이라든가 ‘롯파(코미디언이자 수필가 등으로 활약한 후루카와 롯파(古川緑波, 1903~1961)의 애칭=역자 주)’ 등과 함께 대중 연극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도쿄 연극 집단’, 약칭해서 ≪TES≫를 만듭니다. 1932년에 이 ≪TES≫의 제1회 공연으로 상연된 것이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를 일본의 메이지 초기로 번안 · 각색한 걸식 시바이입니다. 뉴욕, 파리, 모스크바 등등과 더불어 서푼짜리 오페라 상연의 세계적 흐름에 재빠르게 대응한 점에서도 획기적이라 할 만하죠. 


  또 한 명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 도쿄 제국대학 독문과 출신인 구보 사카에(久保榮, 1900~1958)입니다. 그는 센다 코레야와 시차를 두고 키지 소극장에 입단하는데, 결핵 환자였던 까닭에 독일 유학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탁월한 독일어 실력으로 차차 독일 표현주의나 현대극의 희곡을 번역 · 소개합니다. 키지 소극장 분열 이후에는 하우프트만의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이나 직공들 Die Weber, 또는 괴테의 파우스트나 쉴러의 도적떼 Die Räuber 등도 번역하고 직접 연출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쉴러의 도적떼요시노의 도적으로, 크라이스트(Kleist, Heinrich von, 1777~1811)의 깨진 항아리 Der zerbrochene Krug단지와 아리따운 마을 처녀와 같이 일본의 상황으로 각색하여 젠신좌(前進座), 이곳은 1888년 가부키 연기자들이 쇼치쿠나 도호의 자본에 흡수되길 꺼려하여 독립한 가부키 극단인데요, 여기서 직접 연출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합니다. 즉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 외국의 희곡을 어떤 형태로 일본 무대에 올릴 것인가라는 여러 가능성을 스스로 시험했다고 할 수 있겠죠. 이후 직접 희곡을 창작하기 시작해 1938년 초연한 대표작 「화산 회지(火山灰地)」를 필두로 극작가로도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갑니다. 이후 키지 소극장이 배출한 인물들은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다양한 반전 활동을 벌여 투옥되거나 연극 자체도 상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Ⅱ. 전후 연극과 브레히트의 수용

  자, 이제 전후인데요. 전쟁 중에 활동을 금지당했던 연극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새로운 극단도 여럿 생겨납니다. 그런 와중에 또다시 서양 연극의 충격으로 전환점을 맞습니다. 처음에는 카뮈나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 연극이었고, 다음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세 번째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인데요. 브레히트는 1933년부터 나치(Nazi)에게 쫓겨 지구를 일주하는 망명 생활을 십여 년간 합니다만, 그 사이 써 놓았던 희곡을 가지고 전후 동독으로 돌아가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이란 극단을 만들어 무대에 올립니다. 그것이 파리 국제 연극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여 1950년대 중반부터 세계적인 브레히트 열풍의 시대가 개막됩니다. 연극인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굉장했다고들 하는데요, 일본에서도 1960년대 전후부터 왕성하게 브레히트가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실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이가 밝혀지겠지만 60년대 후반입니다. 이즈음부터 점점, 이렇게 저의 연극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요. 

  당시는 브레히트의 작품이 여러 형태로 상연되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저도 보았습니다. 하이유좌(俳優座)에서 센다 코레야가 출연한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또 오자와 에이타로(小澤榮太郞, 1909~1988)가 출연한 사천의 착한 사람 Der gute Mensch von Sezuan 같은 작품이죠. 예컨대 사천의 착한 사람은 1999년 봄에 마쓰 다카코(松たか子)가 주연으로 공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세 명의 신이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을 찾게 되는데 창녀 셴테에게 "착하게 살아야 돼. 그래도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라고 둘러치며 돈을 줍니다. 셴테는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되자 악한 사람 슈이타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냅니다. 결국 최후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신이시여, 어찌해야 하나요."라며 호소해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라며 신들은 장밋빛 구름을 타고 떠나버리는데, 이 최후의 장면에 셴테 역을 맡았던 배우가 이치하라 에츠코(市原悅子)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의 상황은 이렇듯 브레히트를 중심으로 한 신극만이 아니라, 그 신극에 반기를 드는 형세로, 신극이란 것이 대체로 유럽 연극의 번역극이 중심이었던 까닭에 그것만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이른바 “앙그라 연극”(언더그라운드 연극, 소극장 연극-역자 주)이 등장하게 됩니다. 가라 주로(唐十郞)의 붉은 천막 극장, 사토 마코토(佐藤信)의 검은 천막 극장, 또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가 만든 연극 실험실 텐조 사지키(天井棧敷)라든지, 스즈키 타다시(鈴木忠志)의 와세다 소극장이 바로 이 운동의 근원지였습니다.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도 이즈음 사쿠라사(櫻社)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후반은 전후 일본 연극의 이른바 르네상스 시기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시기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도쿄로 온 촌뜨기 소녀가 있었는데요, 바로 저에요, 눈을 깜빡이며 몸을 떨며 극장을 기웃거렸는데, 신주쿠에 있는 하나조노 신사(花園神社)에 있던 붉은 천막 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 같은 것은 가서 보기가 너무 무서웠죠. 그런 연극을 보던 와중에 또는 어떤 경우에는 여기저기에서 베트남 반전 학생 운동이 일어나던, 시대가 크게 변하던 때이기도 했으니까요. 사실은 일본 근대 문학을 공부해볼 요량으로 대학에 들어왔는데, 일본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 문학을 서재에서만 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시시하게 느껴져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에는 두려움이란 게 뭔지 모를 만큼 젊었으니까요.(웃음) 졸업 논문으로 선택한 것이 브레히트였습니다. 그럼 연극 현장과도 관계를 맺어볼까 싶어 연극 학교에도 햇수로 3년 정도 다녔었죠. 절실히 통감했습니다. 자의식 과잉은 배우에게 독약이라는 걸. 그리고 '자, 날 어디 한번 죽여 보시지'라며 시장 바닥에서 배를 깔 수 있을 만큼 배짱이 없다면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제가 이리 보여도 의외로 연약하거든요.(웃음) 그래서 대학으로 돌아가 독일 연극을 연구하면서 현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죠. 이것이 저의 독일 연극 연구의 입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당시 센다 코레야, 가쿠슈인 대학(學習院大學) 독문과 교수인 이와부치 다쓰지(岩淵達治)로 말할 것 같으면 일본에 브레히트를 소개한 중심인물인데요, 이와부치 다쓰지 선생의 세미나에도 참가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은 이미 거의 주요한 브레히트의 작품은 번역 ·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미라이사(未來社)에서 다섯 권짜리 희곡집을, 가와데 쇼보우 신사(河出書房新社)에서도 전체 여덟 권으로 두툼한 브레히트의 작업이란 희곡집을 간행합니다. 또 몇 몇 브레히트 론도 이미 나와 있었죠. 그런 와중에 독일에서 브레히트의 망명 시기 쓴 작업 일지 Arbeitsjournal가 간행되자, 이와부치 선생을 중심으로 함께 번역해보자 의기투합했습니다. 그 작업이 1973년경부터 햇수로 4년 정도 걸렸는데 가와데 쇼보우 신사에서 전체 4권으로 출간했습니다. 공역입니다만 이것이 제 번역 리스트의 첫머리에 있는 최초의 번역서입니다. 실제 브레히트가 망명 중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떤 연극을 모색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어서, 저희들에게는 정말 좋은 학습의 장이었습니다. 번역한 것을 모두 함께 토론하면서 번역 원고를 만들어가는 즐거운 작업이기도 했지요.


Ⅲ. 브레히트의 안티고네 번역과 공연

  이후 더욱 제 개인사 이야기가 될 듯싶은데요, 후쿠오카의 한 대학(규슈 대학-역자)에 부임합니다. 부임 이후 첫 교수 회의에서 논의가 된 것은 오리엔테이션 때 가라 주로의 붉은 천막 극장이 상연하는 가제노 마타사부로(風の又三郞)라는 연극을 대학 캠퍼스 내에서 공연하도록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교수 회의니까 발언할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묵인하는 형식이 되어 슬금슬금 보러 갔더니, 결국 다른 선생님들도 보러 왔더군요.(웃음) 후쿠오카에서 극단 후쿠오카 겐다이 극장(福岡現代劇場)이 브레히트를 소개하러 온 것을 계기로, 그 가운데 무엇을 공연하면 좋겠느냐, 자 그럼 일본에서 아직 공연하지 않은 작품을 하자해서 안티고네 Antigonē를 상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번역 작품인대요, 공연 팸플릿에 번역 대본이 실려 있고, 거기서 발췌한 것이 배부 자료에 있습니다. 미헬씨라는 독일인 교사가 있었는데,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는데요, 그를 끌어들였습니다. 좋은 브레히트 연극의 공연료는 비싸지요, 오사카 독일 문화 센터와 교섭하면서 갈수록 이야기가 커지더니, 여러 강연회 및 음악회도 포함한 「후쿠오카 독일 문화 월간」행사의 일환으로 안티고네를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소포클레스의 원작의 그리그 비극으로 19세기 초 휠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이 독일어로 번역하는데요, 이를 기초로 브레히트가 망명 시기 가장 마지막에 각색한 작품입니다. 휠덜린을 통해 소포클레스로 돌아가면서, 브레히트다운 독법을 가미하여 현대화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결국엔 브레히트의 작품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죠. 이를 이왕 하는 김에 새롭게 해 보자는 생각에, 그리스어 원작은 전문가인 마쓰나가(松永) 선생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얻는다거나, 휠덜린의 독일어 번역본과 대조해본다거나, 미헬씨와 논의하면서 번역한 것을 다시 극단의 연습 과정 속에서 수정하여 상연 대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번역, 상연 대본을 만드는 일이란 진정한 공동 작업입니다. 번역도 그런 것이겠지요. 사이토 렌씨는 물론, 그의 작품인 상하이 반스킹(上海バンスキング) 등에서 항상 주연을 맡은 요시다 히데코(吉田日出子, 배우)씨는 "사이토 렌씨가 쓴 부분은 절반 정도에 불과해요. 모두가 만드는 것이죠"라고 말씀하셨지만, 진정한 집단 작업 속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 희곡, 특히 번역극 공연 대본의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실제적 예로서, 이하에서는 어떤 식으로 번역했었는지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안티고네는 잘 아시다시피 오이디푸스의 딸입니다. 오이디푸스가 테베(Thebai)를 떠난 뒤 숙부인 크레온이 왕이 되는데 이 크레온은, 소포클레스에게는 전쟁 후일담의 대상이지만, 브레히트의 작품에서는 테베가 아르고스에게 시비를 걸어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바뀝니다. 또 크레온은 이 전쟁의 와중에 전사한 형 에테오클레스에게 영웅으로서 성대한 장례를 치러줍니다만, 적 앞에서 도망치다 죽은 동생 폴류네이케스의 경우 대머리 독수리의 먹이로 삼으라는 포고를 내립니다. 전의 고양을 위한 숙청인 것이지요. 이를 어기고 누이 안티고네가 남몰래 모래를 덮어 동생의 유해를 매장하자 죄를 묻게 되고, 결국 이를 계기로 테베가 멸망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브레히트는 작품 첫 부분에 관객을 향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안티고네와 누이동생 이스메네가 나누는 대화의 서곡으로 시작하여 다섯 개의 장면이 겹쳐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 사이사이에 장로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코러스를 끼워 넣어, 최후에 코러스의 퇴장의 노래로 끝나는, 원작인 그리스 비극에 충실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전체가 운문극(韻文劇)인데요, 대화로서 말을 건네는 부분과,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부분,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부분 그리고 코러스 부분과 같이 몇 개의 서로 다른 문체가 존재하게 됩니다. 우선 이들을 어떤 식으로 번역할 것인가. 예를 들어 안티고네의 최초 대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동생 이스메네여, 오이디푸스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두 갈래의 작은 가지 중 하나. 너라면 알겠지. 저 광기와 고뇌, 치욕의 얼마쯤은"이라며 우선 여동생 이스메네에게 말을 건네고, 그리고 "오랜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빠 에테오클레스는 죽었습니다"라며 긴 방백을 합니다. 이는 안티고네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의 논거를 보이고, 또 여동생 이스메네와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운문이기 때문에 일본어로도 그러한 리듬의 흐름을 문장에서 살리고 싶었고, 또 원작인 그리스 비극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도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그 심층의 벡터를 예측하면서 말이죠. 그것은 무대에서의 연기 문제와도 겹치는 것인데요, 리허설 속에서 그 대사가 시처럼 들리면서도 의미가 통하며, 각각의 톤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궁리해 보았습니다. 이런 작업을 한번 맛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인용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코러스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네요. 코러스는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것인지라 연출과 음악, 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 전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연출가 사와타리 코이치(猿渡公一)씨, 후쿠오카에서 활동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인 야마모토 시게히로(山本成宏)씨, 현대 무용가인 고모리 미치코(小森美智子)씨 등과 논의하여, 음악은 작곡하여 이른바 ‘송 Song'으로 부르지 않고,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를 야마모토씨가 직접 두드린다거나 문지르는 식으로 연주함으로써 현대 음악의 느낌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때 무대에서는 잠시 쉬고 있는 배우들이 주위에 앉아 등장을 기다리는 형식을 취했는데요, 이때 배우들이 여러 악기를 들고 약간은 즉흥적으로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악기들은 타악기 중심이지만 그런 풍의 음을 삽입하고, 정중앙에 코러스가 춤추고 노래하도록 했죠. 그것도 일본어의 억양을 중심으로 해서 말입니다. 찬송가는 아닙니다만, 자연스럽게 노래와 춤으로 이어지도록 음악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일지라도 실제 코러스가 어떤 식으로 노래하며 춤을 추었는가는 결국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리스극에서 코러스는 시민 대표자들이 보편적인 입장에서 의사를 개진하거나 논평하는 형태이지만, 브레히트의 경우에는 정치적 엘리트로서 크레온의 정치를 보완하는 민중들 가운데 여유 있는 장로들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코러스의 노래 또한 제각각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노래하는 방식, 춤추는 방식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인용하는 것은 우선 최초 등장 장면의 노래입니다. 바커스(디오니소스)의 얼굴이 새겨진 지팡이를 지닌 장로들이 지팡이를 이렇게, 탁탁 치면서 등장하여 노래를 합니다. 

전리품이 대단하다/아, 전차의 나라, 테베여/전쟁이 끝나자 우리는/잃었던 기쁨에 젖었네!/모든 신전에 자, 모여/밤새워 노래 부르세!/자아, 테베여, 월계수를 허리에 감고/벗은 몸 흔들리도록/바커스의 춤에 미치도록 빠져들어라!!

  당김음(syncopation) 형식의 타둠 타둠, 이런 식의 리듬인데요,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를 장로들의 기본 모티브로 다음 살펴볼 것이 네 번째 코러스입니다. 이는 전황이 점점 위태롭게 되자, 크레온이 테베의 민중을 독려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겼다, 이겼다. 또 이겼다" 식의 선전선동을 위한 바커스 축제를 개최합니다. 애국심의 고취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의 노래입니다. 이 역시도 이전의 노래와 같은 리듬으로, 잘 못하지만 불러보면 이렇습니다.

육체에 깃든 쾌락의, 그 진수인 바커스여/전쟁의, 그 한복판에서도 자신을 관철하는 바커스여/쾌락을, 추구하길 그만두지 않는 신은, 혈통조차 잊게 하네/멸망을 모르는 바커스여/육욕에, 탐닉한 자는 제정신이 아니네/바커스에게 붙잡히면 맹렬히 울부짖으며/멍에 아래 꿈틀거리며/그 쾌락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소금 굴의 나쁜 공기도, 어두운 바다의 낡은 배도/어떤 하나의 두려움도 없네/여러 가지 기질을 한데 모아서, 모든 것을 하나로 섞어버리네/하지만 바커스는 대지를 폭력의 손으로 오염시키지 않아/온화하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네/아름다운 신 바커스는 싸우지 않고, 그 힘을 내보이네

  싱커페이션의 리듬이지만, 그러나 앞선 노래보다 더욱 강렬하게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다른 노래도 인간의 섬뜩함을 노래한 두 번째 노래나, 크레온에게 충고하는 세 번째 노래, 안티고네의 행위를 비판하고 해석하는 다섯 번째 노래, 그리고 멸망해 가는 테베에 대한 참회를 담은 여섯 번째 노래 각각의 성격을 고려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지막 퇴장의 노래에서는 그 리듬이 무너져가도록 했지만요.


  브레히트의 연극이란 것이 대체로 노래가 삽입되어 있어서, 노래 부분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라는 것은 어떤 음(音), 어떤 음악으로 할 것인가라는 점과 관련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들도 실제 공연과의 관련 속에서 결정해 갑니다. 그 점이 연극의 번역이 소설이나 그 이외의 번역과 무엇보다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시도한 것은 등장인물 가운데 안티고네부터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까지는 왕가의 인물들이고, 번병 이하는 민중들입니다. 이 민중들의 대사에, 후쿠오카에서 공연할 때였는데요, 하카타(博多) 사투리랄까 하카타 말투를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집어넣었습니다. 다만 활자 대본과 상연 대본은 아무래도 다른 것이라 생각해서 활자화할 때에는 생략했습니다. 

  겨우 이틀 공연이었는데 2년 정도 걸렸네요(웃음), 첫 시작부터 따져보면 말이죠. 따라서 연극이란 것은 번역하고, 함께 읽고, 다시 고치고, 음악과 안무를 짜고, 조명 등 무대 장치를 상의하고, 선전하고, 선전을 위해 TV나 라디오에 출연도 해야 하는 데다, 표도 팔아야죠, 결국에 가서는 죽어라 모두들 밤을 새워 무대 의상까지 꿰매야 했습니다. 젊었으니 가능했던 일이겠죠. 후쿠오카라는 도시의 광대함도 한몫했다고 생각하지만, 대학교 학생들과 동료, 그리고 후쿠오카 시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돈을 각출해서 보태야 할 만큼 벌이는 없었습니다만, 이것이 현장과 연계된 희곡 번역의 한 예입니다. 이런 작업을 싫어할 수 없는 것이, 한번 빠져들면 인간관계가 워낙 끈끈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대본으로 다른 극단, 그러니까 이케부쿠로(池袋) 소극장이나 오사카 돔에서도 상연했었고, 세타가야(世田谷) 공공 극장에서는 1999년 2월 미야자키 마코(宮崎眞子) 연출, 쿠타니 도모코(鞠谷友子) 주연으로, ‘드라마 읽기’라는 의도적으로 간결한 형태로 상연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또 하나 알려드리면 역시 같은 극장에서 내년 3월 제가 번역한 브레히트의 갈릴레오의 생애를 마쓰모토 오사무(松本修) 연출, 에모토 아키라(柄本明) 주연으로 공연할 예정입니다. 상연 시간만 아마도 세 시간 반이 넘는 완역 공연이 될 것입니다. 또 들어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998년이 브레히트 탄생 백주년이라, 그 흐름으로 다시 브레히트 작품의 공연이 많아지기도 했고요.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러한 안티고네 번역의 체험 이후 70년대 말 도쿄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번역극의 상연수가 상당히 감소했습니다. 배우나 가수를 위한 '호흡법' 관련 책의 번역을 부탁받고 출간한 것이 이 즈음이었습니다. 더구나 유학했다는 점도 있고 브레히트에 관해, 사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일부다처적 경향이 있던 브레히트의 주변에 매력적인 여성들이 많았던 차에, 그 브레히트와 여성들의 삶에 관해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성모와 창부를 넘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을 기초로 앞서 상하이 반스킹」을 쓴 사이토 렌씨가 희곡을 쓰고, 검은 천막 극장의 사토 마코토씨가 연출을 맡아 브레히트 오페라라는 제목으로 내년 가을 신 국립 극장에서 상연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망명기의 브레히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인데요, 브레히트 역에는 무라이 쿠니오(村井國夫), 브레히트의 아내 바이겔 역에는 오오토리 란(鳳蘭), 비서이자 애인인 슈테핀 역에는 스노키 유코(楠侑子)가 맡아 출연할 계획입니다. 처음에는 브레히트 작품 가운데 무얼 상연할까 이야기를 나누다, 브레히트의 삶을 오페라로 꾸며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어, 이 기획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번역은 아니지만 브레히트의 인생을 저 나름대로 번역한 책을 사이토 렌씨가 희곡으로 번역하고, 그것을 나아가 사이토 마코토씨가 무대 위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번역이라는 장(場)에는 다양한 위상의 '번역'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써 여러분께 소개한 것입니다. 브레히트의 본국 독일에서도 예가 없는 일본 오리지널 브레히트 오페라」이고요. 

  제가 번역한 것들 가운데 다섯 번째 것은 롯데 레냐 Lotte Lenya(Donald Spoto원작, 東京 : 文芸春秋, 1992)라는 작품입니다. 롯데 레냐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작곡가였던 쿠르트 바일(Kurt Weil, 1900~1950)의 아내로, 브레히트가 일부다처적 경향이 있었다면 이 여인은 일처다부적 경향이 있던 흥미롭고도 희한한 여성인데요, 이 책은 스포토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쓴 그녀의 전기입니다. 영어로 된 원작이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저는 이 두 가지를 참조하면서 번역했습니다. 우연하게도 미야모토 아몬(宮本亞門)씨가 이 책의 영어판을 읽고 이를 나름대로 소화해서 나는, 바일이라는 뮤지컬을 만들었습니다. 그 뮤지컬의 상연 팸플릿에 실릴 글을 부탁받고 「나는 바일=나는 레냐」라는 글을 쓰면서 서로 알게 되었는데요, 이 역시 직접적으로 희곡이 아닌 것을 기초로 무대를 꾸리고 있지만, 큰 의미에서 보면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레냐가 남편 바일을 회상하는 형식의 미야모토 아몬의 순수 창작 뮤지컬인 것이죠. 재능 있는 사람이로군, 하고 생각했는데 머지않아 유명하게 되었더군요.

  여섯 번째로 번역한 것은 체호프의 풍경이란 스위스에서 출간된 사진집입니다. 안톤 체호프의 글귀를 군데군데 써넣은 사진집으로 독일어에서 중역한 것인데, 이케우치 오사무(池內紀)씨의 수필을 함께 끼워 넣은 꽤 두꺼운 훌륭한 사진집입니다. 체호프는 일본 연극계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들 합니다.


Ⅳ. 하이너 뮐러의 현대 연극에서의 위상

  근래에는 앞서 말씀드렸듯 실제로 독일 연극을 번역하는 장(場)이나 상연 의뢰도 거의 드물게 되어 브레히트 공연이 있을 때 상연 팸플릿을 쓰거나, 독일 관련 작품들과 관련해서는 독일 극단의 방문 공연이나 독일 연극계의 현황 소개 같은 글의 원고 청탁은 있어도, 희곡 번역 의뢰는 거의 없어, 대학 연구 간행물에 번역을 하던 중에 시작한 일이 HMP라는 프로젝트입니다. 오늘 또 하나 소개드리고 싶은 것이 이 HMP의 활동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HMP라는 것」이란 글과 군조(群像)(1992년 11월호)에 실었던 글이 있는데, 이는 여러분께 복사해서 나누어 드렸습니다. 연극 평론가 니시도 코진(西堂行人)씨가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1929~1995)의 햄릿 머신(HM)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일본 연극 현장의 문제를 생각하는 프로젝트(P)를 꾸려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있어, 테라야마 슈우지씨의 연극 실험실 텐조 사지키(天井棧敷)에서 활동을 시작해서 만년의 테라야마씨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는 극작가 기시다 리오(岸田理生)씨, 스즈키 타다시(鈴木忠志)씨의 SCOT(Suzuki Company of Toga)에서 독립한 연출가 스즈키 겐토(鈴木絢士)씨, 거기에 미국 연극 연구자인 우치노 타다시(內野儀)씨 이렇게 다섯이 중심이 되어 1990년 프로젝트로 출발했습니다.


  하이너 뮐러란 사람은 브레히트의 죽음을 대신하듯 동독 연극계에 데뷔한 극작가로, 처음에는 현대극을 썼는데 동독 건국 시기 문제를 다루면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지나치자 점점 상연 금지 및 출판 금지를 당하게 되어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그리스극,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작품의 개작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런 속에서 1977년 발표한 것이 햄릿 머신입니다. 1986년 유레카지에 이와부치 다쓰지의 번역이 게재되고, 니시도 코진씨도 그 글을 읽고서 대체 ‘햄릿 머신’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를 중심으로 일본 연극과 유럽 연극, 혹은 세계 연극 상황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그런 장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죠. 앙그라 연극(소극장 연극 운동) 이후 신극(新劇)이 비판을 받게 되고, 아울러 번역극 상연이나 유럽 연극과의 유대 관계도 점차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외국에서 극단이 점차 직접 찾아오게 되었죠. 타데우즈 칸토르(Tadeusz Kantor), 얀 파브르(Jan Fabre),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웃음)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등등이 차례차례 방문합니다. 유럽의 연극계와 일본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이 점이 진정한 연극 현장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 처한 현대 연극을 고민하는 화두로서 이 햄릿 머신을 놓고, 일본에서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뮐러를 번역 소개, 상연했는데요, 이 결과물들은 하이너 뮐러 텍스트 집」(전체 3권)과 뮐러 자서전 싸움 없는 전쟁으로 갈무리되었습니다. 그 당시 뮐러는 아직 생존해서 활동 중이라 몇 번이나 일본에 방문했었고, 그때마다 심포지엄이나 토론회도 열려, 뮐러와 관련한 번역 · 소개 · 공연 ․· 간담회 등의 행사도 동시에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HM은 가능한가(HMP 편집 · 발행)라는 잡지도 출간하면서 실천 현장인 연극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활동을 병행하는, 상당히 독특한(unique)한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동유럽 혁명, 동독이 소멸해가는 정치적 전환기와 국제 연극계에서 뮐러의 영향력이 깊어져 가는 과정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기도 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엑스페리멘타(Experimenta) 연극제에서는 오직 뮐러만을 22일간 상연했고,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에서도 '하이너 뮐러의 사건'이라는 특집을 꾸몄습니다. 또 바이로이트 음악제(Bayreuther Festspiel)에서는 뮐러가 직접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을 연출하여 그것이 상당히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 의상을 담당한 사람이 야마모토 요지(山本燿司)씨였습니다. 군조(群像)(1994년 2월호)에 저의 뮐러 인터뷰 기사가 실리거나, 그가 사망한 1995년에는 몇 개의 추모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1996년 유레카지 5월호는 '하이너 뮐러 특집호'로 발간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주류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뮐러는 가장 중요한 20세기의 극작가이자 연극인 그리고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라 생각합니다.


  햄릿 머신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해체 · 탈구축하면서 등장인물이나 장소, 시간의 지정도 없는 아주 겨우, 아니 전혀 근대 연극 상연 문법으로는 상연 불가능한 작품인데요, 묘한 도발적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세계 연극인들이 이에 도전하고 또 좌절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 작품의 번역에 관해 말씀드릴 시간이 없는 관계로 텍스트를 참조하면서, 상황이 열악하지만 녹화해 둔 공연 비디오 두 개를 함께 봐주셨으면 합니다. 

  첫 작품은 세타가야(世田谷) 공공 극장에서만 상연되었던 렌니쿠 코보우(錬肉工房)의 햄릿 머신입니다. 연출가 오카모토 아키라(岡本章)씨는 노오(能nou)를 오늘날에 맞춰 되살리려 꾸준히 노력해온 분으로, 노오의 시테가타(シテ方:노오의 역할 가운데 하나로 가면을 쓰고 춤과 노래를 하는 배우-역자 주)로서 여성 가면을 썼던 세오 기쿠지(瀬尾菊次)씨, 스위스에 위치한 R.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가 설립한 괴테아눔(Goetheanum)에서 13년간 독일어 낭송법을 수업하고 돌아온 가와테 타카히코(川手鷹彦)씨가 가세하여 대사는 일본어와 독일어를 혼용하고, 공연 중에 바이올린과 플루트 그리고 노오에서 사용하는 북을 직접 연주하는데, 불에 그을린 철로 금속성의 느낌을 더한 노오 무대에서 각각의 대사와 연주가 반은 즉흥적으로 길항하도록 했습니다. 꽤 하이브리드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 독일 원작을 우리가 살아가는 일본 문화의 심층에서 되살려보려는 시도로 상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극 역시도 리허설 과정에서부터 함께했었죠.

 

Robert Wilson&#44; Hamlet-machine
로버트 윌슨의 「 햄릿 머신 」 한 장면

  다음 작품은 1986년 세계적 호평을 받았던 미국 포스트모던 연극의 기수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 연출한 햄릿 머신을 잠깐 보겠습니다. 뮐러의 농밀한 텍스트를 희석시킴으로써 밀도를 낮춰 미국 문화의, 이른바 윌슨 자신의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한 듯 상당히 컬러풀한 연출인데요, 얼마 되지 않은 햄릿 머신의 텍스트로 두 시간 반의 무대를 꾸리고 있습니다. 음악은 필립 글라스(Philip Glass)가 작곡한 이른바 미니멀 뮤직입니다. 

  참으로 일본적인 햄릿 머신과 또한 진정 미국적인 햄릿 머신. 재미있는 점은 뮐러의 이 원작으로부터 어떤 무대가 서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죠. 자신의 연극관이나 연극 구상을 직접 펼치지 않으면 애초부터 무대에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무대이건 전혀 다릅니다. 뮐러 자신은 1990년 이를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하나로 묶어 여덟 시간짜리 햄릿/머신을 연출하고 있는데요, 근대 연극과 포스트모던 연극의 상연 문법을 함께 조응해가면서 독일 통일 직후의 상황도 투영한 듯 보이는 그 무대 역시 압권이었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아니 어쩌면 하이너 뮐러의 작품 그 자체가 희곡의 번역과 상연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근대 일본에서 독일 연극의 번역과 수용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저 자신의 경험을 통한 희곡 번역의 특성과 수용의 문제점이라 할 만한 것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연극이란 것은 독서를 통해 수용하는 문학과 달리 실제 상연하고 관객이 찾아와 주셔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세계인지라 큰 성공을 노리는 대중성과 질 높은 예술성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는 이를 연극이 갖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원리로 여기고 동시에 추구하려 했지만, 실천 현장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을 향해 전달하는 방식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큰 의미에서의 '번역'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연극이라고 하면 가부키나 노오가 전부였던 상황 속에서 유럽의 연극을 전범으로 태동한 일본의 새로운 연극은 문화 수용의 장에 있어 타국과 자국, 인터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범인류적 감각과 자기 정체성, 타자와 주체 사이의 문제를 곧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실천을 통해 제기해 왔으며, 그 대극적 상황은 근대 일본 연극사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 사상의 역사에서도 축조해온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과정 속에서 독일 연극의 수용이 맡아온 역할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부터라도 독일만이 아닌 여타 국가의 연극 번역이, 물론 공연 숫자나 그 소개가 현저히 감소해온지 20여년이지만, 더욱더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일어권에도 브레히트나 뮐러 이외에 소개되어야 할 극작가나 작품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 연극'으로 공립 극장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 비해 공적인 원조가 거의 없던 일본인지만 세타가야 공공 극장 등과 같은 공립 극장을 곳곳에 세우고, 시즈오카현(靜岡縣)에서 19994월부터 6월까지 제2회 극장 올림픽(The Theater Olympics)이 열리듯 그래도 최근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습니다. 바다 저편과 이쪽의 장대하고 풍성한 대화가 더욱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라도 외국 연극의 수용이나 소개는 더더욱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일본에서 번역 ․ 소개되어야할 독일어권 극작가와 주요 작품

  하이너 뮐러라는 한 그루의 나무로 독일 희곡의 풍성한 숲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난이 있습니다만, 저의 본의는 아닐지라도 그런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어권에는 브레히트나 뮐러 이외에 소개되어야할 극작가나 작품이 아직 많이 있는 까닭입니다. 「독일 현대 연극 총서」와 같은 것을 간행할 가능성에 대해 과거 출판사의 문을 두들겨 본 적이 있습니다만, 연극 관련 출판물은 팔리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꼭 일본어로 번역 · 소개되어야만 할 독일어권의 극작가와 그 대표 희곡 작품-저마다 대표작이라 해도 대표 작품이 많은 작가도 있어 고르는데 망설임도 없지는 않았지만-을 우선 한 작품씩 들어보았습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영웅 광장 Heldenplatz」; 류종영 역, 「습관의 힘, 영웅 광장」(목원대학교 출판부, 2003)

페터 한트케- 우리가 서로를 몰랐던 시간들 Die Stunden, da wir nichts voneinander wussten
                   ; 김원익 역, 「진정한 느낌의 시간」(이상북스, 2020)

엘프리데 옐리네크- 구름, 집 Wolken. Heim

마를레네 슈트레루비츠- 뉴욕 뉴욕 New York New York

페터 투리니- 빈을 둘러싼 전투 Die Schlacht um Wien

베르너 슈바브- 영부인들 Die Präsidentinnen

보토 슈트라우스- 이타카 Ithaka

크리스토프 마르탈러- 영시 Die Stunde Null

포르카 브라운- 미완의 사회 Unvollendete Geschichte

크리스토프 하인- 원탁의 기사들 Die Ritter der Tafelrunde

토마스 브라쉬- 카르고 Kargo


◆한국에서 번역된 독일어권 극작가와 주요 작품 

독일 현대 희곡선(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브레히트 희곡 선집1 · 2(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하이너 뮐러 희곡선(정민영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피터 한트케, 「관객 모독」(양혜숙 역, 예니, 2001; 윤용호 역, 민음사, 2012)
                 
「말 타고 보덴호 건너기」(라삐율 역, 이오-에디션, 2020) 


◆저자의 블로그

https://tanigawamichiko.hatena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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