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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백 년 - 미국 문학과 일본의 근대

번역 백년

by trans2be 2022. 3. 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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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라 코노미(荒 このみ)
출처: 『飜譯百年』, 大修館書店, 2000, pp.3~23.

   
 

         목  차

Ⅰ. 전후 인상(Impression)으로서의 외국 문학=미국 문학
Ⅱ. 1960년대~70년대의 미국 문학
Ⅲ. 미국 원주민 문학의 출현
Ⅳ. 무시된 여성 작가의 문학
Ⅴ.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작품
Ⅵ. 실코의 의식과 그 이야기 구조
Ⅶ. 아프리칸 미국인 여성 작가 해밀턴
Ⅷ. 번역의 어려움 그리고 즐거움

 

​​Ⅰ. 전후 인상(Impression)으로서의 외국 문학=미국 문학

荒 このみ
아라 코노미

  오늘은 미국 문학의 번역에 관해 이야기해보려합니다만, 다른 외국 문학에 비해 모두 미국 문학에는 익숙하신 분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공개강좌 시리즈에서 번역의 역사에 대해 역시 말씀드리고 싶기도 하지만, 미국 문학의 경우 역사가 너무 길어 이를 말한다는 것은 저에게 불가능합니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패전을 맞은 1945년을 분기점으로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점령군이 들어오자 일본은 그때까지의 유럽 지향에서 압도적으로 미국 지향으로 변화해 갔기 때문입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문학의 소개, 번역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세대(아라 코노미는 1946년생이다-역자 주)라 해도 여러분은 제 세대가 언제인지 모르시겠지만 (웃음) 저희 세대보다 더 젊으신 분들이라면 외국 문학이 곧 미국 문학이라는 인상을 품고 계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전후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누어드린 번역 작품 리스트는 1945년 이후부터의 작품을 싣고 있습니다. 물론 전체를 망라하고 있을 수는 없고, 대체로 모두가 알고 있을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어느 정도 번역되어 왔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또 반드시 그 작가의 제일가는 걸작은 아닙니다. 예컨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의 경우 「통조림 공장 마을 Cannery Row」(1945)이란 작품보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9)가 더 유명하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압도적으로 읽혔던 미국 문학의 작가가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인상이 틀리다면 난처하겠지만 아마도 헤밍웨이가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작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화된 작품이 많아서 잘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29)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0) 등 말이죠.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2, 영화 1955)이나 「분노의 포도」(영화 1940)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점령군의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헤밍웨이나 스타인벡은 실은 이미 과거의 작가들이죠. 1930년대의 작가입니다. 동시대의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집필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만. 패전 이후 일본에 대해서 미국은 미국의 강한 이미지, 좋은 이미지만을 이식하였습니다. 따라서 흑인 작가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또 미국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 예컨대 얼스킨 콜드웰(Erskine Preston Caldwell, 1903~1987)의 「담배길 Tobacco Road」 (1932)과 같은 작품은, 이것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영화도 금지되었습니다. 50년대가 끝나갈 무렵까지 결코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미국 문학을 선택해서 번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겨우 50년대 말 정도가 되어서, 혹은 60년대가 되자 일본 사회도 안정되어 갑니다. 흑인 문학도 소개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여기 가져온 것은 하야카와 서방(早川書房)에서 나온 《흑인 문학 전집》(본 전집은 하야카와 서방에서 1961년~1968년까지 흑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총 21권에 담아 번역한 것임-역자 주)인데요, 이는 획기적인 기획이었습니다. 1961년에 간행되었지요.

  50년대에는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1962)가 일본을 방문하고, 나가노(長野)에서 세미나를 열어 일본의 문학 연구자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고, 스타인벡도 일본을 방문합니다. 미국 정부의 주선으로 작가가 잇따라 보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인에게 미국 문학은 매우 친밀한 것이 되어갑니다.


Ⅱ. 1960년대~70년대의 미국 문학

  그러면 1960년대, 70년대의 미국 문학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죠. 이 당시는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 헤밍웨이, 포크너, 스타인벡과 같은 작가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유대계의 미국인 작가가 활약하고 있습니다. 76년 유대인 솔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가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대단히 작품을 많이 쓴 작가로, 나누어 드린 리스트에는 「헤어조그 Herzog」(1964)라는 작품을 넣어두었습니다. 솔 벨로우,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 버나드 맬러머드(Bernard Malamud, 1914~1986),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 1915~2005),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모두 유대계 작가입니다. 노먼 메일러의 작품에는 1948년작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The Naked and the Dead」를 리스트에 올려 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 까닭인지 전쟁문학 작품이라 그래서일까요, 비교적 일찍 번역되었습니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裸者と死者, はだかしゃとししゃ)'라는 일본어가 당시 상당히 신선하게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문학이 이제 앵글로색슨이 아닌 유대계 작가에 의해 선도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입니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52년 「내츄럴 The Natural」이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것이 맬러머드의 처녀작입니다. 벨로우의 처녀작은 「허공에 매달린 사나이 Dangling Man」(1944)입니다. 그다음 아서 밀러는 극작가로 1915년에 태어났는데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아서 밀러는 2005년 2월 10일 코네티컷주 록스버리에서 사망하였다-역자 주)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1949)이란 희곡을 알고 계실 분도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이 작품은 1949년에, 그리고 「도가니 The Crucible」(한국에서는 '시련'으로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역자 주)라는 작품은 53년에 출판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들 유대계 작가들도 60년대에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40년대부터 이미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전부터 이 같은 유대계 미국인 작가가 나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후 45년부터 50년대 후반 정도까지 우리 일본의 일반인은 거의 아는 바가 없던 작가들이었습니다.

  1970년대의 미국 사회는 변해갑니다. 그 계기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45년 패전이 일본 사회를 철저하게 변화시킨 것처럼, 베트남 전쟁이 70년대 미국 사회를 상당히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맞은 문학 상황도 변해갔습니다. 저는 미국의 70년대를 곧잘 「여성의 시대」였다는 식으로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여성의 시대」이기도 하고 또 「마이너리티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사회에 소수자라는 것은 예컨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든지 아시아계라든지, 라티노(스페인어계)가 되겠지요. 스페인어계라는 것은 멕시코계의 미국인이나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등에서 온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의 원래 모어는 스페인어로 히스패닉이라고도 불립니다만, 현재는 라티노가 의식적으로 곧잘 사용됩니다. 그 비율은 뚜렷이 변화가 있습니다만, 70년대에는 참으로 뚜렷하게 격렬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1993년 노벨상을 수상한 아프리칸 미국인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자신의 처녀작 「가장 푸른 눈 The Bluest Eye」을 발표한 것이 1970년입니다. 작가가 39세였을 때입니다.

  흑인 여성 작가가 많이 출현한 것 외에 중국계로 「여전사 The Woman Warrior(1976)」 를 쓴 맥신 홍 킹스턴(Maxine Hong Kingston, 중국명 탕팅팅(湯婷婷))이 있습니다. 현재에는 「조이 럭 클럽 The Joy Luck Club」(1989)을 써 베스트셀러가 된 에이미 탄(Amy Tan, 중국명 탄언메이(譚恩美))이 있습니다. 탄 역시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입니다. 일본계 미국인 작가로는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작가로 유일하게, 비교적 미국의 주요 신문과 서평지에서 평가된 작가는 신시아 카도하타(Cynthia Kadohata) 정도일까요? 신시아의 작품, 이것을 저는 「일곱 개의 달」이란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원제목(원제목은 「The Floating World」 임-역자 주)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떠 있는 세상」이 됩니다. 왜 「떠 있는 세상」이 아니라 「일곱 개의 달」인가 하면, 그 당시 영국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역시 일본계 영국인인 카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작품명이 「떠 있는 세상의 화가(浮世の畵家, 원제는 An artist of the floating world)」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번역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과 겹치지 않도록 약간 다른 제목을 붙였습니다. 번역하여 출판할 경우에는 이 같은 상황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Ⅲ. 미국 원주민 문학의 출현

  1970년대부터 유난히 눈에 띄게 되는 것이, 오늘밤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것으로, 이른바 원주민 작가입니다.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이라 불리거나,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 Indian)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실은 이러한 호칭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이티브’라는 것은 「그곳의 토착의」라는 의미로, 그곳(아메리카-역자 주)에서 태어난 미국인인 까닭에 요즘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이라 일반적으로 불려 왔던 사람들을 20여 년 전부터 ‘네티브 아메리칸’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에는 차별적 언어의 느낌이 있기 때문이죠. 원래 신세계를 ‘발견했던’ 콜럼버스는 아시아의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해서,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인디오라고 불렀기 때문이죠. 잘못되어 있는 호칭을 정정하려고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고안된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학에서 ‘네이티브 인디언’ 문학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 정도부터 이러한 호칭도 또한 백인이 만든 언어로 차별적 언어가 아닌가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원주민으로부터요. ‘아메리카 인디언’ 가운데에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는 현실적으로 인종차별의 구조가 있기에, 완곡 화법으로 마치 차별이 없는 듯 은폐하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 아닐까요? 차별을 정면으로 직시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영국계가 아닌 미국인, 또는 백인이 아닌 미국인을 이른바 「하이픈을 붙인 미국인」(마치 Korean-American처럼-역자 주)이라 하지만, 원주민만이 아니라 「미국의 흑인」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등도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차별 언어의 문제라는 것이 말이죠. 따라서 ‘네이티브 아메리칸 리터레쳐(Native American Literature)’라고 해도 좋고, ‘아메리카 인디언 리터레쳐’(America Indian Literature)라 불러도, 어느 쪽이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이른바 원주민으로부터 작가가 눈에 띄게 되었던 것이 70년대입니다. 여기서는 레슬리 마몬 실코(Leslie Marmon Silko)라는 작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실코는 라구나 푸에블로족(The Laguna Pueblo, 미국 뉴멕시코주 중서부에 위치한 푸에블로 인디언, 그리고 그들의 보호구역-역자 주) 출신의 아메리카 인디언 작가로, 저는 이 작가의 「의식 Ceremony」(1977)이란 소설을 번역했습니다. 실코 이전에도 원주민 작가는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사람은 N. S. 마마데이(Navarre Scott Momaday)라는 카이오와족(The Kiowa) 출신의 작가입니다.

  1968년에 마마데이는 「새벽의 집 House Made of Dawn」(1968)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합니다. ‘새벽에 만들어진 집’이라는 것이 원제의 충실한 번역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바호족(The Navajo)의 청년입니다. 이 작품은 이듬해인 69년 퓰리처상을 받습니다. 카이오와 인디언이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메리카 인디언의 작품이 미국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메리카 인디언 문학을 말할 때 1968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 이후 아메리카 인디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마데이가 선구자로서, 그 후에 실코 등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실코는 마마데이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Ⅳ. 무시된 여성 작가의 문학

  나누어드린 리스트를 보시면 잘 아시리라 생각되지만 1945년부터 시작해서 69년에 이르기까지 여성 작가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여성 작가가 태어나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있는 것처럼 잘 알려진 여성 작가가, 적어도 제가 무의식적으로 꼽아본 작가와 작품명 가운데 69년에 이르기까지 선정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69년이 되어서야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를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오츠는 그야말로 다작의 작가로, 현재까지도 정력적으로 작업을 잘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편집 편집 등에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여성 작가입니다. 70년대에 토니 모리슨이 처음으로 문단에 나옵니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전부 나누어 드린 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만, 77년에는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Song of Solomon」와 실코의 「의식」이 발표됩니다.

  1982년에는 흑인 여성 작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이 출판됩니다. 물론 앨리스 워커라면 60년대부터 시를 발표하고 있었고, 또 단편 소설도 쓰고 있습니다. 80년대가 되자 갑자기 펑하고 튀어나왔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워커의 작품으로 대표적인 것,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작품입니다. 84년에는 루이스 어드리크(Karen Louise Erdrich)가 문단에 나옵니다. 어드리크도 원주민 작가입니다. 독일계 미국인인 아버지로 인해 사진만 보면 그 모습이 백인처럼 보이지만, 치페와족(The Chippewa) 출신입니다. 「사랑의 주술 Love Medicine」으로 미국 전체에 알려진 작가가 됩니다. 이 같은 책 제목도 이때까지 미국 문학에는 없던 별스런 제목입니다. 「주술 medicine」이라는 것은 원주민의 삶, 철학, 신앙과 깊이 연관된 낱말입니다. 85년에는 어슐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을 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SF 물을 많이 쓰고 있는 작가로, 이른바 순문학이 아닌 SF 작가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르 귄의 경우 그와 같이 한정할 필요는 그다지 없습니다. 그녀의 폭넓은 상상력은 감탄할만합니다.

  전후 50년을 개관해 보았습니다만, 1945년 이후 50년대나 60년대에 여성 작가나 마이너리티 작가들의 작품이 얼마나 출판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 확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하면 7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쏟아져 나왔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Ⅴ.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작품

  한데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70년대 말 무렵 친구와 학교에서 사용할 미국 문학 텍스트를 편집하게 되었습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네 편을 선택했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 네 편은 앞에서도 소개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단편, 여성 작가이지요. 그다음 버나드 맬러머드, 이 사람은 유대계 작가입니다. L. B. 데 젠킨즈, 이 여성 작가는 상당히 알려지지 않은 라틴계열의 작가입니다. 그리고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작품이었습니다. 다문화주의적 텍스트가 되었지요.

  저는 이 당시까지, 1976년인데요, 그때까지 레슬리 마몬 실코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문학사에는 물론 나와 있지 않았고, 미국 문학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실코의 「자장가 Lullaby」라는 단편을 접하고, 저는 굉장히 쇼크를 받았습니다. 큰 충격이었지요. 이 같은 미국 문학이 있었는가 하고요. 이런 작품을 쓰고 있는 미국에 사는 작가가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죠. 이 작품과의 만남에 의해 저는 미국 인디언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실코에 주목하게 되면서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생각하던 중 그 이듬해였던가, 「의식」이란 장편 소설이 출판되어 나옵니다. 곧바로 읽었습니다. 그 이후 번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자장가」를 읽었을 때, 비로소 미국 남서부의 자연이 내 자신에게 와닿았습니다. 레슬리 마몬 실코는 라구나 푸에블로 부족입니다만, 「자장가」에 등장하는 것은 나바호 부족 인디언입니다. 나바호족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면, 이른바 '네 모퉁이'(four corners: 미국 남서부 지역으로 콜로라도주 남서부, 유타주 남동부, 애리조나주 북동부, 뉴멕시코주 북서부로 이루어진 지역이다-역자 주)라 불리는 지역에 나바호족의 보호 지역이 있습니다. 애리조나주, 뉴멕시코주, 네바다주 그리고 콜로라도주는 서로 인접하고 있는데, 이 4개 주가 어떻게 나뉘어 있느냐 하면, 미국 정부는 완전히 인공적으로 자를 대고 주 경계선을 결정했습니다. 완전히 직선으로 종횡의 선을 그었던 것이죠. 두 개의 선이 교차하고 있는 지역을 ‘네 모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주변에 상당히 넓은 나바호 인디언의 보호 지역이 있습니다. 대체로 그 근방이 「자장가」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코의 라구나 푸에블로족의 보호 지역은 어느 근방에 있는가 하면, 뉴멕시코주의 주도(뉴멕시코주의 주도는 산타페 Santa Fe로 저자의 착오로 보인다-역자 주)인 앨버커키(Albuquerque)에서 가까운 곳으로, 앨버커키보다 조금 더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바호족의 보호 지역과 거의 인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자장가」라는 작품에 관해서는, 나누어드린 프린트에 첫 머리와 결말 부분의 단락을 인쇄해 놓았습니다. 이 작품의 번역본이 아직 나오지 않은 관계로 영어 원문 그대로요, 변명입니다만. 이야기의 첫 단락부터 그들이 거주하는 토지의 풍경 묘사가 실로 뛰어나게 이루어져 있어, 대체 이곳이 미국 어딘가에 존재나 하는 것일까 감동하며 읽었습니다. 특수한 고원지대의 풍광과 말라붙은 물길 같은 것에 관한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 나옵니다. 예비 지식이 없으면 대체 이게 뭐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요. 점점 소설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등장인물인 노부부가 있고, 그 노부부가 저승으로의 여행길을 떠났던 것이로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 1914~1987)의 소설 가운데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가 있는데요, 그것과 상당히 흡사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같은 통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추운 밤, 자식이 노모를 등에 업고 산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자장가」의 경우 늙은 아내는 아직 건강하지만 남편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직업도 잃고 자식들도 백인 사회로 나가거나 전쟁에서 죽어버리거나 합니다. 그래서 늙은 어미는 지아비를 데리고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 높은 고원을 향해 떠납니다. 가장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말이죠. 미국 남서부 근방에 있는 고원을 ‘메사 mesa’라고 하는데, ‘메사’라는 것은 스페인어로 ‘탁자’라는 의미입니다. ‘메사’는 고원 지대에서도 정상이 흡사 탁자처럼 평평한 곳을 일컫습니다. 그 같은 ‘메사’가 이 지역 근방에는 상당히 많습니다. 서부극 영화를 보면 자주 나오지요. 캘리포니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사진 같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나무가 전혀 자라지 않는 갈색의 고원 지대가 나오는데, 그것이 ‘메사’입니다. 노부부는 눈 내리는 추운 밤에 ‘메사’로 올라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가 차라리 좋은 것입니다.

  죽을 장소를 찾게 되자 늙은 어미는 회상을 시작합니다. 즐거웠던 부족 생활, 할머니로부터 어머니로, 그리고 딸이었던 자신으로 이어진 나바호 부족의 직물 기술과 직기. 첫 출산. 아들딸의 성장 그리고 미국 정부의 인디언 정책으로 인해 자녀들이 먼 병원으로 보내졌던 일 등. 이제 자신의 인생에 끝을 맞으며 늙은 인간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소설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차가운 맑게 갠 하늘의 묘사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힙니다. 처음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폭풍이 몰아칩니다. 이윽고 점차 잦아들어 갑니다. 죽음이 가까워 오자 거센 바람도 조금씩 누그러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역으로, 이번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굉장히 춥게 됩니다. 투명한 차가움이 하늘을 꿰뚫고 있고, 광활한 하늘에는 커다란 구름떼가 바람에 휘날리며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이 실코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의 갈기가 흩날리듯 구름이 유연히 흘러갑니다. 그 움직임과 공기의 차가움이 읽고 있어도 피부에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자연 묘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 시가 자장가입니다. 그 자장가, 혹은 시라 할지라도 겉치장이 없는 소박한 시인 것입니다. 단순할지라도 인간의 정을, 자녀와 형제자매의 애정과 강한 유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인디언 부족의 사람과 자연의 일체감은 이 소박한 시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라고 생각합니다.

 


 

Ⅵ. 실코의 의식과 그 이야기 구조

  제가 실코의 초기 장편소설 「의식 Ceremony」(1977)을 번역한 것은 15년 전입니다. 그 당시 출판사의 의지에 따라 제목을 선정적인 타이틀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출판사의 뜻을 따라, 지금 입에 올리기에도 창피하지만 「슬픈 인디언」이란 제목으로 하고 말았습니다. 서평은 꽤 많이 나왔습니다만, 예상대로 어느 서평에선가 제목이 썩 좋지는 못하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이번에 문고본으로 재간하고 싶다는 말이 있어 드디어 영어의 원제목 그대로 번역하여 「의식」으로 정정할 수 있었습니다.

  「의식」이란 작품을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이는 1945년부터 50년 경에 걸쳐 미국 뉴멕시코주를 무대로, 주인공은 티요라는 이름의 라구나 푸에블로 인디언입니다. 보호 구역에서 자랐으나 아버지는 백인 혼혈입니다. 티요는 지원병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합니다. 필리핀 정글에서 일본군과 싸웁니다. 이윽고 종전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전쟁 후유증에 걸려 부족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어 군인 병원에서 서양 의학 치료를 받습니다만 어찌해도 차도가 없습니다. 결국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서 나와 고향인 라구나 푸에블로 보호 구역으로 돌려보내 집니다. 그리고 부족에게 전승되어온 치유 의식, 매디신 맨(medicine man)이라 불리는 주술사에게 치료를 받아 정신의 균형을 회복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는 서양의 근대적 의학이 아닌 부족의 의식에 의해 점차 정신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한다면 그런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무대가 된 뉴멕시코주의 그 주변은 원폭 실험이 행해진 곳이기도 해서, 원자 폭탄이라는 극히 최근의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Navajo Sand Painting
나바호족의 모래 그림

  이 작품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그 구성에 있습니다. 실코는 이 작품을 마치 부족의 이야기꾼이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구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등장인물이 있고,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하고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그 복잡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매디신 맨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나바호의 모래 그림(sand painting, 砂繪)도 알지 못했습니다. 부족에게 전해오는 창조 신화나 우주관 그 모두가 저를 자극했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나누어드린 인쇄물의 첫 부분은 「일출」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도 또한 「일출이여, 이 제물을 받으소서. 일출이여」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선 라이즈(Sun Rise), 태양을 향해 기도를 올리면서 「이 제물」이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간도 장소도 등장 인물도 들락날락합니다. 복잡하죠. 한번 읽어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같은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작가는 필시 (어떤-역자 주) 경계를 없애려 하는 것일 테지요. 또 민화를 끌어들인다거나 속된 얘깃거리를 불러내고, 정부의 인디언국의 보고서나 민속학자의 논문을 더해서 문학 장르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코는 현대적 인간으로 고등 교육도 받았기 때문에 영어가 자신의 언어입니다. 라구나 푸에블로의 언어는 거의 조금밖에 말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써서 활자화된 문학 속에서 구비문학의 전통을 멋지게 녹여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설 첫 부분에 시와 같은 것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것을 나누어드린 자료에 실어 놓았습니다. 잠시 읽어보도록 하죠.

치치나코는 생각하는 여인, 방에 들어앉아 이리저리 생각하면 무엇이건 나타나지. 치치나코는 누이를 생각하네, 노우치치와 이쿠치치, 모든 우주를 만들었지, 이 세계와 그 밑의 네 개의 세계를. 생각하는 여인은 거미의 여인, 여기저기 물건에 이름을 붙이지, 그러면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네.

  인디언의 창조신화가 이야기되고 있군요. 물건이란 처음에는 이름이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이름을 붙이거나 생각이라는 행위만으로 그 물건이 나타나게 된다는, 그 감각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치치나코는 앉아서 오늘, 이야기를 생각하지. 그것을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거야.」 거미 여인의 생각이, 여기서는 물건이라 해도, 이야기가 되어 그것을 실코가 들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거미 여인의 등장으로 저는 놀랐습니다만, 그 이외에 옥수수 여인이나 갈대 여인 등의 등장으로 점점 부족에 전해지는 민담의 세계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여름이었다. 이쿠토아아코야는 갈대의 여인, 언제나 미역을 감고 있다. 온종일 강 속에서 첨벙첨벙 여름 비를 맞고 있다. 이쿠토아아코야의 누이는 옥수수의 여인, 아침부터 늦게까지 온종일 일해서 햇살에 빛나는 땀방울, 손이 아프도록 일하고 있다. 이미 진절머리 나게 화가 나서 누이에게 고시랑 고시랑 말했다. 온종일 미역이나 감느냐고. 아쿠토아아코야는 갈대의 여인, 떠나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지하의 세계로. 그로부터 이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여기도 저기도 말라붙어 초목도, 옥수수도, 콩도 모두 말라붙어 날아갔다, 바람에 날려. 사람도 짐승도 목이 바짝바짝, 모두가 굶어 죽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미국 남서부가 무대이기 때문에 불모 지대, 사막 지대입니다. 그래서 항상 햇볕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작물을 자라지 못하게 해버리니까요. 물놀이 같은 것은 그만하고 일하라고 성을 내자 미역을 감고 있던 물의 신이 지하의 세계로 숨어버립니다. 이로써 지상에는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는 민담인데, 이 이야기가 티요의 체험과 결부되어갑니다. 「티요는 비야, 멈춰줘라고 기도했다. 그로부터 육 년 간 한발인 상태다.」 이렇게 기도를 한 상황은 티요가 군인으로 필리핀 정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미국 군인은 포로가 되었을 때 빗속을 행군해야만 했습니다. 주룩주룩 정글의 비가 끊임없이 내렸습니다. 제발 비야 멈춰라, 티요는 그곳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가 멀리 라구나 푸에블로의 혹은 나바호의 보호 구역에까지 이르게 되고, 비에 목마른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티요는 그것을 이유로 자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아메리카 인디언 청년이 백인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는 식의 비극이 된다면 이는 비판 소설이 되고 맙니다. 실코는 비판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 의식의 이야기였던 까닭에 부족의 전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전개를 바라며 전통적인 의식 역시 변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Ⅶ. 아프리칸 미국인 여성 작가 해밀턴

  실코의 이 같은 작품도 미국 문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문학의 등장으로 미국 문학은 백인이나 유대계 미국인 작가만이 아닌, 또 캐논(Cannon, 정전)이라 불리는 고전, 예컨대 H.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이나 N.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 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됩니다. 실코와 같은 작가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미국 문학이 풍요롭게 활기를 띠게 되었으니,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한명의 작가를 소개해서 오늘날 미국 문학의 폭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버지니아 해밀턴(Virginia Hamilton, 1936~2002)이라는 흑인 여성 작가입니다. 저는 해밀턴의 프리티 펄의 신비한 모험 The Magical Adventures of Pretty Pearl이란 작품을 번역했습니다. 아동 문학을 많이 저술한 작가입니다. 인디언 작가의 문학 작품을 읽고 번역함으로써 저는 미국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 전통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깊이를 더해갔는데요, 해밀턴과 같은 아프리칸 미국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는 동안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그런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리티 펄의 신비한 모험은 「미국의 어느 흑인」 이야기입니다만, 그 흑인이 아직 아프리카에 있을 당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신의 아들, 그가 바로 프리티 펄(Pretty Pearl) 즉 「프리티 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리티 펄이 아프리카의 산을 내려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날아오고, 그래서 「미국의 흑인」이 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역시도 또한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거미의 여인이 영혼이기도 했던 것처럼, 이 이야기도 신의 세계로부터 전개가 됩니다. 첫 단락을 잠시 읽어보도록 하죠.

아주 먼 옛날, 프리티 펄은 높은 산에서 내려왔다. 어느 맑게 갠 날, 케니어산에 있는 집을 나서는 꿈을 꾸고 있다. 언제나 이런 높은 곳에서, 신의 아들이란 재미가 없다. 경쟁을 해도 프리티 펄은 신의 아들 가운데에서는 무엇을 해도 일등이다. 이해도 빠르다. 신은 무얼 말하더라도 너무 말이 많아. 프리티 펄은 그렇게 생각했다. 산을 내려가면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그래, 돌연 생각이 떠올랐다. 형을 찾아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거룩한 산에 사는 신 가운데 가장 힘 있는 자가 프리티 펄의 형이었다. 그의 이름은 존 데 콘케아로 가장 높은 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데 콘케아라 불러주게」라고 형은 밑의 신들에게 말했기에 모두들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프리티 펄과 데 콘케아에게는 손위에 또 형이 있다. 그 형의 이름도 존으로, 세 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이름은 존 헨리 라우스터바우트였다. 존 헨리는 아주 오래전 산을 내려가 아득한 아랫녘까지 가보았다.

  첫 페이지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존 헨리 라우스터바우트라는 이름이나 주인공의 프리티 펄이라는 것. 번역할 때 등장인물의 이름에 깊은 의미가 들어있을 경우 번역자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냥 이름을 음 그대로 옮길 것인가, 「카와이이 퍼루(예쁜 진주)」처럼 일본어로 고쳐버릴까. 결국에는 프리티 펄로 결정했습니다만. 형인 신들도 어떻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존 데 콘케아의 경우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존 헨리 라우스터바우트가 문제였습니다. 라우스터바우트(roustabout)란 영어로 항만 노동자, 특히 선박 내에서 화물을 다루는 노동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존 헨리라는 이름은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 장사의 이름입니다. 1869년 미국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는데, 그 당시 존 헨리라는 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증기 드릴에 대항하여 맨손으로 터널 굴착 경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승리한 순간 사망해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존 헨리의 이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신의 이름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와서 즐거움이 생깁니다. 존 데 콘케아는 John the Conqueror, 즉 정복자 존이란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의 재미가 있기에 내용을 전하려 할 경우 일본어(가타카나, 片仮)만으로는 기호가 되어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배경의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죠. 번역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백 퍼센트 완벽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Ⅷ. 번역의 어려움 그리고 즐거움

  이디쉬어(Yiddish: 중유럽 및 동유럽의 유대인 사이에 사용되는 언어로, 독일 방언에 슬라브어, 특히 폴란드어와 헤브라이어가 섞여 생겨난 언어로, 유럽 및 미국의 유대인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다. 표기는 헤브라이 문자로 한다.-역자 주)를 사용하는 작가로 1978년 노벨상을 수상한 아이작 B. 싱어(Isaac Bashevis Singer, 1904~1991)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폴란드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에 살면서 이디쉬어로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를 솔 벨로우와 같은 작가와 공동으로 영어로 번역해왔습니다. 저 역시 번역에 참가하고 있습니다만, 그 번역의 와중에 이디쉬어의 유머 40%가 사라지고 만다고 말합니다. 번역에는 이런 면이 있는데, 그래도 어떡해서라도 되도록이면 원문이 지닌 맛을 살리고 싶다는 바람으로 해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누어드린 인쇄물 가운데 무슨 일로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씨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일까 생각하실 텐데요. 말씀드리면 호흡입니다. 번역을 할 때 호흡의 예로서 그의 글을 실은 것입니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구두점을 찍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자에게도 작가에 따라 궁합이 잘 맞기도 하고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야 유타카씨의 경우에는 여하튼 만연체의 문장을 씁니다. 호흡이 길지요. 항상 우주를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라 우주적 시간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두점이 거의 없습니다. 알아보기 어렵다고 한다면 알아보기 어려운 문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까닭에 하니야 유타카만이 쓸 수 있는 문장으로, 참으로 느낌이 좋은 아름다운 문장인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읽히는 것이겠지요. 여러분이 번역을 한다면 자신만의 호흡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호흡만으로는 독자에게 불쾌할 수도 있으니, 독자를 배려해야겠지요.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보여주고 말하기(Show and Tell)」이라고 해서 어떤 물건을 가져오도록 하여,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져왔습니다. 용도가 변해버린 물건이죠. 우선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실코의 「의식」에도 나온 모래 그림(sand painting)입니다. 나바호의 모래 그림은 주술사가 치유를 위해 그려나가면서 환자의 마음의 상처나 병을 치유해가는 행위입니다. 땅 바닥에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의식 뒤에는 이를 바람에 날려 없애버려야만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아교로 고정시켜 관광객을 상대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각으로 각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여자를, 계란형의 둥근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남성을 나타냅니다. 모래 그림은 이제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나바호의 직물과 함께 저는 이 같은 부족의 예술에 대해서도 실코의「의식」을 통해서 눈떠 온 것입니다. 「의식」을 읽을 당시에는 나바호의 주거 지역이나 메사 지대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번역을 마친 이후 가보았습니다. 뉴멕시코주의 갤럽(Gallup)이란 도시에서는 매년 8월 전미 인디언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작품의 무대가 된 장소를 직접 본 이후 다시 실코의 작품을 읽어보니 또 감흥이 달라 즐거운 독서 체험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신기한 것은 드림 캐처(dream catcher)라는 것으로, 침대 위에 걸어두어 악몽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마치 곰의 잠자리처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입니다. 작고 푸른 터키석에는 주술의 효력이 있습니다. 푸른색이 「의식」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또 쌈지 속에는 여러 가지 약초나 새의 깃털 등이 들어있는데요, 이 역시도 힘의 근원입니다. 제가 가져온 이것은 관광객용 상품이기 때문에 가짜죠. 이 같은 물건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 상상의 세계가 더욱 커져가고, 마음도 넉넉하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코를 통해 저는 미국 문학의 폭이 확장됨을 느꼈습니다. 실코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저는 눈앞에 없는 미국 남서부의 자연을 마음속에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학 작품의 번역은 이러한 즐거움과, 그리고 살아가는 힘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인용 번역 문헌

レスリー・M・シルコウ, 儀式(荒このみ訳, 東京 : 講談社, 1998.1)

ヴァジニア・ハミルト, プリティ・パールのふしぎな冒険(荒このみ訳, 東京 : 岩波書店, 1996.7)

シンシア・カドハタ, 七つの月(荒このみ訳, 東京 : 講談社, 1991.3)

 

◆추천 미국 문학 작품

Hawthorne, Nathaniel, 緋文字The scarlet letter(八木敏雄訳, 東京 : 岩波書店, 1992.12)

Melville, Herman, 白鯨Moby-dick(田中西二郎訳, 東京 : 新潮社, 1977)

Thoreau, Henry David, 森の生活 : ウォールデンlife in the woods, (飯田実訳, 東京 : 岩波書店, 1995.9)

Dickinson, Emily, ディキンソン詩集 : 対訳(龜井俊介編, 東京 : 岩波書店, 1998.11)

Twain, Mark, ハックルベリー・フィンの冒険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西田實訳, 東京 : 岩波書店, 1977)

James, Henry, デイジー・ミラーDaisy Miller(西川正身訳, 東京 : 新潮社, 1993.6)

Dreiser, Theodore, シスター・キャリーSister Carrie(村山淳彦訳, 東京 : 岩波書店, 1997.6)

Fitzgerald, F. Scott, 華麗なるギャツビーThe great Gatsby(大貫三郎訳, 東京 : 角川書店, 1957.2)

Faulkner, William, 響きと怒りThe sound and the fury(高橋正雄訳, 東京 : 講談社, 1997.7)

Steinbeck, John, 怒りのぶどうThe grapes of wrath(大橋健三郎訳, 東京 : 岩波書店, 1961)

Mitchell, Margaret, 風と共に去りぬGone with the wind(大久保康雄,竹内道之助訳, 東京 : 新潮社, 1977.6)

Williams, Tennessee, 欲望という名の電車A streetcar named desire(小田島雄志訳, 東京 : 新潮社, 1988.3)

Capote, Truman, 夜の樹Tree of night and other stories(川本三郎訳, 東京 : 新潮社, 1994.2)

Silko, Leslie, 儀式Ceremony(荒このみ訳, 東京 : 講談社, 1998.1)

Auster, Paul, 孤独の発明The invention of solitude(柴田元幸訳, 東京 : 新潮社, 1996.4)


◆ 인용 작가 작품 국내 번역서 함께 보기

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ceremony」, 강자모 역, 동아시아, 2004.
신시아 카도하타, 「키라키라 kira-kira」, 최아진 역, 지식의 창, 2012.
신시아 카도하타, 「지구 반대편에서 Half a world Away」, 고정아 역, 문학수첩 리틀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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