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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언어학(3)- 번역이란 무엇인가, 세 번째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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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4호(통권 208호), 2017.4, 8쪽.


번역이란 무엇인가

말과 세계

  보통 우리는 특정한 사물이나 개념의 호칭, 그리고 그 의미를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과연 말과 의미는 서로 불가분의 떨어지지 않는 관계일까. 아니면 말과 의미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근대 언어학은 소쉬르의 언어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연구는 지금까지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언어학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연구와 사상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는 세계의 사물과 대상 그리고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 기호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부정했다. 즉 그는 사물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 기호의 관계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기호의 자의성(Caractères arbitraire du signe linguistique )’이라 한다. 언어 기호는 그 기호가 가리키는 개념(내용)과 청각 혹은 영상(형식)의 결합으로, 개념을 시니피에(signifié, 기의), 청각 영상을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으로 규정하고 시니피앙을 시니피에와 연결하는 관계성은 자의적이라고 그는 지적했다(소쉬르, 1981:98). 말(馬)을 ‘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특정한 동기가 있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은 어디까지나 각각의 사회에 의해 자의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말을 ‘개’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것이 기호의 자의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문자나 소리 등의 청각 영상은 한 번 표현되면 그 자체는 고정화되어 두 언어 사이에서는 전이가 불가능하게 된다. 번역에서의 이론적 불가능성은 이 언어 기호의 청각 영상에서의 형식 전환의 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가 만약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라면 두 언어 간의 번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가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양자 관계는 필연성이 없으며 또 근거도 없으므로, '시니피에'는 유동적이고 전이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번역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은 사물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그 말과 사물 사이에서 양자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 의미이다. 그 사물은 보는 사람의 입장이나 시대, 사회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변화하므로 그 양자를 결부시키고 있는 의미도 변화한다. 그리고 그 의미에는 해석하는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가치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의 값어치가 될 것이다. 십만 원짜리 가방을 예로 들면 가방의 값어치는 십만 원인 셈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십만 원이 가방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가치가 당사자에게는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번역의 경우에도 어느 텍스트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에 걸맞은 가치를 다른 텍스트에게 부여하는 것이 번역자라 할 것이다. 그리고 목표 언어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이 그 가치를 동일하다고 인정하는 번역이야말로 이상적인 번역이 된다. 두 개의 택스트는 똑같을 수 없다. 즉 양자는 ‘십만 원=가방’처럼 등가(=)로 맺어지는 관계는 될 수 없지만, 그 가치가 동등하게 맺어지는 것은 가능하다. 이 의미의 등가 교환은 단어의 의미가 문자나 소리 등의 형식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본어로 식사 때 주고받는 'いただきます itadakimasu'는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감사를 드리는 말이다. 이 말은 자기 이외의 타인, 다른 존재에 대한 감사의 생각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는 모종의 정신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 'いただきます itadakimasu'를 "나는 지금부터 먹겠습니다"라고 외국어로 번역했을 경우, 그 독자적 정신성이라는 가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는 그 문화권에서의 다양한 가치 체계의 공존에 의해 서로 그 가치를 결정하고 있다. 즉 전체 체계 속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말은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의 범위는 다른 말과의 관계성에 의해 더욱 강하게 규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번역자는 기점 언어와 목표 언어를 이원적으로만 파악해 그 사이에서 등가만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말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항상 변화한다. 양자는 고정적인 어느 지점에 뿌리를 내린 고정된 것으로 번역자에게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기점 언어에 의해 기술되고 있는 텍스트도 어떤 개념이 문자화 된 일종의 번역이며,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가 그 해석을 한다는 것은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세계를 영원히 추구해 가는 작업이 될 수 있다. 텍스트는 영원히 도망치는 ‘변화’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 언어로 표현된 시점부터 항상 추구되는 대상이라고 하는 측면을 겸비하고 있다.


  벤야민은 번역이란 "여러 언어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일종의 잠정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벤야민, 1994:79). 원작과 번역은 '순수 언어'라 불리는 고차적인 언어로 연결되어 있고, 원작과 번역된 것은 서로 보완해 나가는, 마치 숨은 씨앗이 발아해가는 것과 같이 원작 속에 내재된 본질이 번역문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벤야민은 현실태의 여러 언어는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 번역에 의해 ‘인식의 완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 세계의 알 수 없는 관념을 하나하나 명확히 조탁하면서 그 의미를 결정하고 인식하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말 속에 던져지고 그 말에 의해 인간으로 키워진다. 언어를 통해 사고하며 자기 이외의 타인과 의사소통을 도모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해 나간다. 이 ‘말’은 친근하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말에 앞선 관념이란 존재할 수 없고 말이 나타나기 전에는 무엇 하나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결정하고,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나하나 더해간다. 그 누적의 한 형태가 번역이다. 진정한 번역은 투명하여 원작을 숨기지도, 원작의 빛을 가리지도 않는다. 진정한 번역은 순수 언어를 번역의 고유 매체인 번역 언어로 보강하고 증폭한 만큼 원작 위로 빛을 던진다.(벤야민 1994:86)

  이와 같이 벤야민은 두 언어 간의 의미의 등가 교환이라는 번역의 실제적인 목적을 넘어 이 세계의 '인식의 완성'이라는, 보다 심원한 성과를 번역자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것은 무거운 책임인 동시에 강력한 격려이기도 하다.

[인용문헌]

  • 페르디낭 드 소쉬르,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역, 『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岩波書店, 1981년 제10쇄. 
  • 발터 벤야민, 노무라 오사무(野村修) 편역, 「번역자의 과제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폭력 비판론 외 10 편』 岩波書店,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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