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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언어학(2)- 번역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3. 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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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2호(통권 206호), 2017.2, 7쪽.


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 가능성의 토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적 존재가 인간인 이상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번역의 가능성을 고찰하는데 유용하다. 어떤 인간이든 경험과 그것에 근거한 의식에는 유사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유사성에 관해 나루세 다케시(成瀬武史)는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유사성', '지각 기관의 공통성', '감각적 자극에 대한 생리적 반응의 유사성',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의 유사성', '국제적 문물 ‧ 사상 ‧ 인사의 교류' 등을 추정하고 있다(나루세, 1989:30~31). 인종과 국경을 넘어 우리가 공감과 동감과 같은 감정 이입에 의한 상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성질도, 인간이 자신의 인식을 언어화하는 형식의 유사성을 호출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의 인식과 정신의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촘스키(Chomsky, Avram Noam)는 “언어 보편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인간 언어의 가능한 다양성에 관한 매우 제한적이면서 꽤 그럴듯한 가설, 그러니까 내재적인 정신 활동에 상응하는 지식 습득 이론을 개발하려는 시도에 기여하는 가설의 정식화를 이끌어 냈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언어 연구는 일반 심리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 같다."(촘스키, 1980:151)며 인간 언어와 정신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그는 유아의 언어 획득을 예로 들어 인류가 보편 문법을 생득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가정하고, 표층 문법과 심층 문법의 차이를 명확히 하면서 언어와 인간의 정신적 표현의 보편적 관계성에 주목했다. 세계의 모든 언어는 표층 구조에서는 다양하지만 심층 구조에서는 보편적인 공통적 특징을 가지며, 특정한 사회의 시간적·공간적 제약 속에서 공유되고 있는 각각의 언어는 생득적인 언어 운용 능력의 보편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언어의 경우, 정신의 여러 생득적 특질과 언어 구조의 여러 특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예측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언어는 결국 그 정신적 표현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어떠한 특질을 가지든 그것들은 언어를 발명한, 그리고 각각의 이어질 다음 세대에 의해 새로이 언어를 발명하는, 유기체의 생득적인 정신 과정에 의해 언어 사용의 제 조건과 연합하는 모든 특질과 함께, 언어에 주어진 특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촘스키, 1980:146) 이와 같이 언어는 인간 정신 활동 과정의 조직 내부를 탐색하는 탐침봉과 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이 가진 생득적 언어 능력이 바탕이 되어, 소속된 사회 언어와 접촉함으로써 그 능력이 개발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떤 사유와 사상도 언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 능력에 관한 심층 구조의 유사성과 보편적 측면에서 본다면 <언어 간 번역>에 의해서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나루세 다케시는 다음과 같이 언어에 의한 전달 수단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나루세, 1989:32)

1. 어떤 언어에도 경험 및 의식 내용에 대응하는 단어가 존재한다.
2. 한 언어의 학습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능력은 다른 언어의 학습에도 적용될 수 있다.
3. 언어 표현에 사용되는 문장의 기본적인 구조에는 유사성이 있다.

  이와 같은 유사성에 의해 우리는 두 언어 혹은 여러 언어를 병용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그 유사성을 기초로 두 언어 혹은 다언어 병용자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번역’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유사성은 특별한 훈련 없이 자연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자연 언어가 갖는 합리적 측면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는 뿌리 깊다. "번역자는 배신자(Traduttore, traditore)"라는 이탈리아 격언이 있듯이, 역사적으로도 번역자는 그다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전에 동시통역을 하고 있었을 때 화자(話者)가 말장난을 계속해서 통역이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던 청중에게 "웃어 주세요"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통역을 마치자 화자가 "오늘 통역은 아주 좋았어요. 통역을 통해서 이 정도로 청중에게 반응을 얻은 적은 처음입니다"라고 통역 내용을 칭찬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나 스스로가 ‘배신자’ 임을 실감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번역자는 결국 어느 한 언어에 치우쳐서도 또 한 언어를 방치해서도 안될 것이다. 결국 중간적 존재로서 양쪽의 기대를 모두 저버리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가능키나 한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늘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처하게 되는 상황은 상술한 격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문화 교류가 적었던 시대에는 나라를 배신하고 도망한 사람이나 타국의 포로가 두 언어 병용자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격언은 번역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무거운 모종의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번역의 한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일까. 번역에 의해 구체적으로 변용되어 버리는 요소란 원문의 음, 글자 수, 문법상의 성 개념, 어순이나 다의어 등이다. 각각의 언어에는 독자적인 발음 형식이 있어서 설령 외래어라도 맞춤법의 차이로 인해 원래의 단어와는 음소가 다르다. 글자 수도 원문과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순도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정 성에 근거한 문법적인 성 개념을 옮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게다가 대구(對句)나 비유 표현, 언어적 유희 등도 번역 불가능한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다의어를 번역하는 경우는 의미의 취사선택이라고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특히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경우 메우기 어려운 간극을 낳고 만다.

  이론적으로는 상술한 여러 형식적 요소에서 보는 번역의 한계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번역자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의 (번역-역자 주) 기술의 향상을 지향한다. 번역자 자신의 기술에는 한계가 없다. 즉 번역의 한계를 확인한 다음, 그 메우기 어려운 격차를 자신의 번역 기술에 의해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번역에 관련되는 여러 문제를, 인간 상호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생각해 보면, 동일 언어라도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오해가 생기기 일쑤다. 그 오해를 수정하는 방법이야말로 사실 중요하며, 번역에서도 어떤 오해가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를 수정할 것인가에 유의한다면 번역으로 인한 치명적인 오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통찰력과 창조성이 풍부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 지식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항이나 목표 언어권에 관한 문화적 지식, 즉 세계에 대한 지식 역시 필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배신자인 이상 성실하고 창조적인 배신자이고 싶다.

[인용 문헌]

  • 노엄 촘스키, 가와모토 시게오(川本茂雄) 옮김, 『언어와 정신(言語と精神) Language and Mind』 河出書房新社, 1980년.
  • 나루세 다케시(成瀬武史), 『번역의 이모저모(翻訳の諸相)』 開文社出版,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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