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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언어의 번역(1) - 성스러운 말씀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1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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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12호(통권 216호), 2017. 12, 7쪽.


성스러운 말씀

  지금까지 언어학, 언어 철학, 해석학 등의 다양한 이론과 학설에 기초하여 번역 전반에 관한 문제들을 번역자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특히 종교 언어의 번역에 초점을 맞추어 전도(mission)와 번역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해보고자 한다.


  어떠한 종교든지 그 진리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일반화된다. 영성이 샘솟는 것 같은 신비체험이라 해도 혹은 하늘의 계시라 할지라도 언어 없이는 그 종교적 체험을 ‘가르침’으로서 대중에게 알릴 수 없다. 그것은 언어화되어야 비로소 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교 현상에 관한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가 종교 언어이다. 원전이나 성전(聖典), 경전이라 불리는 문헌에는 각각의 전통에 의해 길러진 독자적 세계관과 가치 체계에 기초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특정 종파나 교단 등의 집단 내에서 특유의 의미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어쩌면 이를 아득히 능가하는 듯한 초월적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특정 전통이나 그 집단 내에서의 사용과 해석, 그리고 교리의 기본 구조를 무시해서는 이들이 보여주는 의미 내용이나 표현하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곤란하다.

  이와 같은 종교 언어라 불리는 특수한 텍스트 번역에도 종종 곤란함이 따른다. 그것은 원래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특정 언어로만 표현 가능한 것인 까닭에 다른 언어로의 변환을 완고하게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말레이시아 클루앙(Kluang)의 아라비아어나 베다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등은 독자적 음운 구조나 음소 그 자체에 종교적 진리가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성스러운 말씀’을 번역을 통해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설사 이런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텍스트의 해석일 뿐, 거기에 깃든 종교적인 의의나 권위를 드러낼 수는 없다. 번역하는 그 순간 신성성을 잃어버려서, 이미 보편적인 ‘성스러운 말씀’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종교 언어의 번역에 관해서는 그 전제로서 우선 번역이란 행위에 대한 각 교리의 허용 여부라는 허가성(許可性)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 독자적 교리로부터 원전이나 성전의 번역 허가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가 그 가능성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그럼 실제 다양한 종교에서 번역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민족 종교의 경우 ‘성스러운 말씀’을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동일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면서 특정 민족이나 인종이 믿기 때문에, 민족 영역과 언어 영역이 일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그저 ‘태어남’으로써 그 신앙 전승이 이루어져, 다른 민족이나 이문화에 대한 전도에 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원전 번역이 필요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따라서 종교 언어의 번역에 관해서는 다른 민족이나 언어 문화권에 대한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종교에서 그 필요성이 생긴다. 이 경우 구원의 논리가 전 세계, 전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경우가 많아서, 상술한 번역의 허가성을 이끌어낼 수 없는 종교를 제외하면 필연적으로 언어의 벽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세계에 각각의 ‘성스러운 말씀’만 존재하고 있다면 그 구원 역시 쉬웠을 것이고, 번역에 의한 의사소통의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 이외의 말이 다수 존재해서 번역 없이는 언어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다. 언어의 창조나 분열을 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하는 언어 신수설(言語神授說)을 취하는 종교의 경우 ‘성스러운 말씀’과 다른 언어와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 교리적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긴 역사를 지닌 기독교의 성서 번역에 관련한 다양한 고찰은 종교 언어의 번역에 대한 일정한 시사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경우 언어의 기원을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교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이 세계에는 이처럼 실로 많은 언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명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교리적으로 제시하는 것, 즉 언어 신수설에 관한 확고한 논리 구조야말로 성서 번역에 관한 논란에 대한 실제적 근거이자 그 실천적 기반이 되어 왔다.

  ‘바벨탑’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탑이다. 「창세기」 제11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 온 땅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같은 말로 대화를 했다.
  2.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 시날 땅의 평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3. 사람들은 서로 말했다. "자 벽돌을 만들고 이를 잘 굽자" 이렇게 그들은 돌을 대신하여 벽돌을, 진흙을 대신하여 역청을 이용하게 되었다.
  4. 그들은 말했다. "자 우리는 하나의 마을을 지었으니,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달하는 하나의 탑을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의 이름을 알리자.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5. 야훼는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자식들이 짓고 있던 마을과 탑을 살펴보았다.
  6. 야훼가 이르기를 "보라, 저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갖는 하나의 민족이다. 그래서 그 시작한 최초의 일이 이와 같다. 지금 그들이 도모하는 어떤 일이라도 불가능한 것이 없게 되었다."
  7. "좋다, 우리는 내려가 저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여 그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하리라."
  8. 야훼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의 지면으로 흩어지게 하여, 그들은 마을을 짓는 것을 포기하였다.
  9. 그런 까닭에 마을의 이름을 바벨이라 부르니, 거기서 야훼가 온 땅의 말을 혼란케 하고, 또 이로부터 야훼가 그들을 온 땅의 지면으로 흩어지게 한 때문이다.(세키네 마사오(關根正雄), 1995:32)

  ‘성스러운 말’은 그 종교적 진리와 상당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도가 필요한 종교 문헌의 경우, 다른 언어에서도 똑같은 작용이나 긴밀한 유대 관계가 보증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리와 교설 속에 세계의 여타 일반적 언어들이 (신성한-역자 주) 의미를 획득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 일례가 상술한 ‘바벨탑’에 관한 기술이다.

  원전이라 불리는 것과 번역된 것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해석본 정도의 일정한 가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 가치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번역이라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번역자의 기술적 신뢰도에 대한 것보다 우선 번역을 향한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종교 언어의 번역 가능성을 질문해 가면서 번역으로 인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종교 언어의 역사와 학문 또는 신학 간의 불가분의 관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인용문헌】

  • 「구약성서」 《창세기》, 세키네 마사오(關根正雄) 역, 岩波書店, 1995년(제63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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