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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언어의 번역(3)- 번역의 원전성과 재현 가능성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2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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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4호(통권 220호), 2018. 4, 6쪽.

 


번역의 원전성과 재현 가능성

  <성스러운 말씀> 에서 지적한 바벨탑 신화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의 언어 구조, 즉 인류가 서로 의사소통이 곤란할 정도로 다종다양한 언어와, 그 언어들에 뿌리를 둔 관용어의 존재는 ‘성스러운 말씀’과 다른 언어 간의 불일치라고 하는 긴장 관계를 낳는다. 이 긴장 관계는 ‘성스러운 말씀’에 의해 질서지어진 범 지구적(global)인 완전한 종교적 진리와, 번역을 통해 여러 언어로 구축된 지역적(local)이고 부분적인 진리라고 하는 종교적 진리 간의 주종관계 속에 놓여 있다. 종교 언어의 번역은 ‘성스러운 말씀’에 의거하는 온전한 진리를 목표 언어를 통해 부분적인 진리로 펼쳐보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통적 교학 혹은 신학으로부터 파생한 일종의 글로컬(glocal)한 교학과 신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종교 언어의 번역은 이와 같은 관계에 기초한 구조 자체를 포섭(飽和)하면서, 보편적인 구조적 질서에 의해 지평이 융합하는 경지, 즉 글로컬한 지평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스러운 말씀'에 의거한 전 지구적인 온전한 진리를, 가령 한 마리의 '코끼리'라고 한다면, 지역적인 교학이나 신학으로서의 언어 번역은 그 '코끼리'의 머리, 코, 이빨, 등, 다리, 꼬리 등, '코끼리'의 일부분에 해당할 것이다. 언어의 번역은 그러한 부분적인 진리이며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코끼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코끼리’ 전체는 머리, 코, 이빨, 등, 다리, 꼬리 등 각 부분으로 이뤄진다. 그것들을 통합해 가는 과정 속에서, 그때까지 찾아내지 못했던 전체상이 부각된다. 온전한 진리에서 현현(顯在化)될 수 없는 '성스러운 말'의 주름진 그림자는, 부분적인 진리 즉 로컬한 교학 혹은 신학으로서의 여러 언어로의 번역을 통해 복합적으로 비추어 봄으로써 재현(現前)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종교 언어의 번역에 의해 평면적인 교학 혹은 신학을 입체적 구조로 재구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스러운 말씀'에 의해 계시된 원전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는 바로 원전 해석의 소급과 성찰을 통해, 정통한 교학 혹은 신학을 보다 정밀한 것으로 승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단이 되지는 않을까.


“번역자의 과제는 번역하는 언어 속에 원작의 메아리를 불러내려는 지향과 그 언어로의 지향을 서로 겹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창작과는 전혀 다른 번역의 특징이 있다. 왜냐하면 창작의 지향은 결코 언어 그 자체에, 그 상대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어 내용의 특정한 연관으로 직접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은 그러나, 문학 작품이 이른바 언어의 내부 숲 자체에 있는 것과는 달리, 그 숲의 바깥에 위치하며 그 숲과 대치하고 있다. 그래서 숲에 발을 들여놓는 일 없이, 자신의 언어 속의 메아리가 다른 언어 작품의 메아리와 그때마다 겹쳐 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를 찾아내고, 그 장소에서, 번역은 원작을 불러들이는 것이다.”(벤야민, 1994:82)

  벤야민은 번역을 원작이라는 '숲'의 바깥에 위치하여 '숲'과 대치하는 것이며, 근원적이고 구상적(具象的)인 원전의 지향성과, 파생적이면서 이념적인 번역 지향성의 차이를 명확히 하면서, '메아리'가 서로 공명하는 것처럼 여러 언어 자체가 상호 보완하며, 화합하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번역자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 언어의 번역에 의해 구축되는 로컬 교학 혹은 신학과 '성스러운 말씀'에 의해 구축되는 글로벌 정통 교학 혹은 신학과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는, 번역이라는 거멀쇠에 의한 여러 언어 간의 기원적 혼인 관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에 관하여 포스트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번역은 이렇다저렇다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이러저러한 내용을 운반하고 이러저러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번역은 여러 언어 상호 간의 인척 관계를 재표기(再標記)하려는,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학적 텍스트나 성스러운 텍스트에 타당한 것이며, 아마도 이것이 문학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두 가지 본질 그 자체를, 양자 공통의 근저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데리다, 1989:31)

  번역에 의해 맺어질 수 있는 '성스러운 말씀'과 나머지 언어들과의 매우 내밀한 관계는 독특한 수렴 관계다. 데리다는 이를 여러 언어 상호 간의 '인척 관계'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 관계가 평화로운 것인 한, 번역은 교학 혹은 신학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될 것이다.

“어떤 그릇의 파편 두 조각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는 양쪽의 파편이 서로 비슷한 형태일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세세한 부분까지 서로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되듯이, 번역은 원작의 의미에 자신을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담아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의 표현을 자신의 언어 표현 속에 형성해가고, 그 결과로서 양자가 하나의 그릇이면서 두 개의 파편으로, 하나의 더 큰 언어이면서 두 개의 파편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벤야민, 1994:85)

  이렇게 보면 다양한 차이나 어긋남, 알력을 수반하는 언어 간의 이질성으로 인해 번역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 하는 점을 주목하기 쉽지만, 벤야민은 언어 간의 절충, 화해, 유화는 상호 보완이라는 형태를 수반하면서, 원작과 번역 쌍방의 새로운 성장을 향해 지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스러운 말씀'이 내보이는 의미 세계에 대한 개척은 '성스러운 말씀' 그 자체만으로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언어로의 번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번역은 항상 여러 언어 간의 내밀한 관계성의 표현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라야 이 세계에 현실태로서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이 세계의 언어 다양성이 우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연인 이유가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다.

【인용문헌】

  • 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폭력비판판론 외 10편」(노무라 오사무(野村修) 편역, 岩波書店, 1994년.)
  • 자끄 데리다, 「타자의 언어-데리다의 일본 강연」(다카하시 노부아키(高橋允昭) 편역, 法政大学出版局,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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