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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언어의 번역(2)- 원전의 부활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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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2호(통권 218호), 2018. 2, 5쪽.

 


원전의 부활

  언어는 착종과 확산이라고 하는 성질과 동시에 항상 변화하는 특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전 문학을 읽는 경우, 현대어로의 변환 없이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간이라는 간격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매일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 그 자체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동일한 어구라 해도 고대에 살았던 사람과 현대인에게는 그 의미와 사용법이 다르다. 따라서 시대를 거쳐온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만 야콥슨(Roman O. Jakobson)이 지적하였듯 "말 바꾸기"라는 번역이 필요하게 된다. 그와 같은 번역은 과거에서 현대로 흐르는 시간을 축으로 한 수직 구조의 번역으로 통시적이다.  

  나아가 동일 언어의 방언이나 다른 언어 간에서 일어나는 번역은 지역적 ‧ 문화적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번역이다. 그와 같은 번역은 동시대에서 공간적인 확산을 갖는 수평 구조의 번역으로 공시적이다. 이와 같은 통시적 ‧ 공시적인 번역의 구조는 이제까지 전 세계에 걸친 그물코와 같이 얽힌 언어의 모든 활동을 담당해 온 인류의 의사 전달 양식 그 자체와 관계하고 있다고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지적한다.

"전달과 관련한 모델은 어떤 것이든 동시에 번역의 모델이다. 즉 의미를 수직(통시적) 혹은 수평(공시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인 두 시대, 어떤 두 개의 사회적 계층, 어떤 두 지역도 완전히 동일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나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가치 평가나 추측 등에 관해서도 완전히 동일한 신호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또 어느 두 명의 사람을 선택해보아도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어도 의미가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스타이너, 1999:94)

  해석은 번역의 ‘선택’이기도 하다. 원전의 해석이란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다양한 해석으로부터 하나를 선택하고, 목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행해지는 선택은 자의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선택이라는 객관적인 근거를 번역자는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동일한 원전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번역이 다르거나, 언어에 따라 번역의 의도하는 바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종교적인 원전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그 해석에 기초한 번역은 원전의 품격과 번역이라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자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구도(求道)를 향한 정신의 확고한 증거임과 동시에, 동시대에 재생한 ‘성스러운 말씀’의 여러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종교 언어의 해석 가능성은 ‘성스러운 말씀’이 번역을 통하여 통시적 또는 공시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이다. 즉 종교 언어의 번역은 과거, 계시로서 고정된 원전에 대하여 항상 호흡을 전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스러운 말씀’에 의해 계시된 종교적 진리가 시대나 지역을 초월하여 통시/공시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번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번역자는 통시적 번역과 공시적 번역을 동시에 행하게 된다. 바로 앞의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종교 언어를 번역하는 경우 교학(敎學) 또는 신학의 요청과 신임이 필요하며, 그 해석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해석도 시간이라는 제약과 역사라는 조류 속에 편입되고, 나아가 교학 혹은 신학의 발전에 따른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 결코 절대적인 것은 될 수 없다. 스타이너는 번역자의 이와 같은 경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일이라고 하면 상반되는 두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즉 원문을 충실히 복제해야 한다고 하는 충동과, 동시에 그에 해당하는 만큼 자신의 힘에 의한 창조 역시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그것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은 이 양자 사이의 혹독한 긴장 관계의 한가운데에서 활동해 가는 셈이다. 요컨대 번역가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형태로 언어 진화의 역사 그 자체를 스스로 ‘체험’한다. 즉 언어와 세계의 사이, 더 정확하게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보이는 상반된 가치관의 공존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스타이너, 2009:419)

  종교 언어의 번역은, 상술한 표현으로 하자면 번역자의 체험은, ‘성스러운 말씀’을 추체험하려는 신앙인의 실존적 욕구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번역은 ‘성스러운 말씀’과 그 가르침을 믿는 모든 신앙인의 정신 활동 전반에 관한 체험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체험은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영속적인 행위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원전의 '말'은 항상 과거의 것이기에 신앙 활동으로서의 통시/공시적 번역에 의해 창조적으로 재생되어, '살아있는 말'로서 자신의 내부에서 되살아나고 또 사람들의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번역은,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 해도, 원작에 비하면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원작의 번역 가능성으로 인해 원작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한다. (중략) 생명의 표출이, 살아있는 것에게는 별 의미가 없더라도, 살아있는 것과 지극히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듯이, 번역은 원작에서 출현한다. (중략) 확실히 원작의 생명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후의 생(überleben)’에서부터 이긴 하지만, 사실 번역은 원작의 뒤에 나온다. 그리고 성립 시기에는 선택된 번역자를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의 경우, 번역은 그 작품 사후의 생의 단계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벤야민, 1994:72)

<참고> 한국어 번역본
하나의 번역은 그것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코 원작에 대해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없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 번역은 원작의 번역 가능성 덕택에 원작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아니 이 연관은 그것이 원작 자체에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만큼 더욱더 내밀하다. 그 연관은 자연적 연관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고, 그것도 더 정확하게 삶의 연관이라고 칭할 수 있다. 삶의 언표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함 없이 그 살아 있는 자와 내밀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überleben)'에서 나온다. 번역은 그렇지 않아도 원작보다 뒤늦게 생겨나며, 자신이 탄생하는 시대에 결코 뛰어난 역자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중요한 작품들의 경우 번역은 그것들의 사후의 삶(Forteleben, 지속된 삶)에서 나온다. (최성만 역, 124쪽.)

  그 자신도 번역자로서 번역에 임한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라는 논고에서 앞서 언급한 ‘사후의 생’이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원전과 번역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는 “번역 속에서 원작은 이른바 언어보다 고차원으로, 더 순수한 대기권 속으로 뻗어나간다”(벤야민, 노무라 오사무 편역, 1994:79) 고도 말하며, 숨어있는 씨앗이 발아해가는 것과 같이, 번역에 의해 원전이 시공을 초월하여 단계적으로 생장해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계시된 ‘성스러운 말씀’을 영원한 ‘사후의 생’으로 소생시켜 보편화를 꾀하는 일은, 번역이라는 끊임없는 갱신과 변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벤야민은 지적하고 있다.

【인용문헌】

  • 발터 벤야민, 노무라 오사무(野村修) 편역, 「번역자의 과제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폭력 비판론 외 10 편』 岩波書店, 1994년. ;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 조지 스타이너, 가메야마 겐키치(龜山建吉) 역, 「바벨 이후(バベルの後に)」 상(1999) ‧ 하(2009), 法政大學 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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