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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언어의 번역(4)- 말할 수 없는 것과 은유(metaphor)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2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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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6호(통권 222호), 2018. 6, 6쪽.

 


말할 수 없는 것과 은유(metaphor)

  종교 언어는 특정한 신, 초월적 존재 등과 관련한 개인의 각성, 신비체험을 제삼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언어로 표현하기 곤란해서, 인간의 지성(人知)을 훌쩍 능가한다. 이점에 관해 에이어(Ayer, Alfred J.)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어떤 무언가가 인간 오성(悟性)의 능력을 초월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유의미하게 기술할 수 없다.……“신은 순수하게 신비적 직관의 대상이며, 그런 까닭에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는 정의할 수가 없다.”(에이어, 1955:148)

  종교 언어의 대상은 인간의 지성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혹은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대상으로 이성적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언어로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겠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메타포(은유)와의 관계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메타포(metaphor)는 ‘초월(meta)’과 ‘운반하다(pherein)’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번역된다. 이는 특정한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의 관련성이나 유사성으로부터 다른 의미를 드러내 보이는 표현 방법이다. 예컨대 ‘신의 손을 가진 의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 의사가 실제로 신의 손을 갖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신의 손’은 탁월한 기술, 차원을 넘어선 능력이 있다는 메타포로서, 전혀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

  종교 언어에서도 이 메타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름할 수 없는 개념이나 존재, 그리고 그 체험 등을 말할 때, 그것과 관련한 모델을 제시하고 메타포를 사용한다. 어떠한 종교 언어라 해도, 메타포를 포함한 비유적 용법 없이는 그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

  또한 ‘성스러운 말씀’에 의해 지시된 내용이나 개념이 반드시 한 가지일 필요는 없다. 메타포를 통해 ‘신’을 말함으로써 말과 대상의 일대일 형식의 이항대립 구도와 그 관계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지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한계성을 동반하는 언어에 의해 ‘신’에 관해 말한다고 하는, 교학 혹은 신학의 근간과 관련한, 참으로 근원적인 과제 또한 명확히 하면서 그 딜레마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메타포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를 통해 하나의 사물이나 사태를 말하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소스키스, 1992:45)

  소스키스(Soskice, Janet Martin)는 이처럼 메타포를 정의하면서 과학 언어와 종교 언어에서의 메타포 사용을 비교했다. 과학 이론의 구축에서는 미지의 물질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언어와 개념을 구축해 나간다. ‘유전자’나 ‘원자’ 등 이런 것들은 미지의 단계에서는 메타포를 사용하면서 그와 유사한 것으로부터 추론하여 연구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메타포도 ‘말할 수 없는 것’을 특정 모델로부터 새로운 관점이나 관념으로 드러내려 한다.


  나아가 종교 언어의 메타포에 관하여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그 기능에 주목했다. 종교 언어의 경우, 텍스트를 표면적인 글자의 의미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될 수도 있다면서, 이를 종교 언어 특유의 문제라고 보았다. 더구나 종교 언어의 텍스트는 특정 시대나 문화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면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한계로 인해 시대가 흐름에 따라 현대 사회와 관련한 다양한 과제나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로 경직화된 종교적 모델을 은유를 통해 통시적/공시적으로 쇄신하여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은유의 신학’을 제창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라는 메타포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만약 부권 주의적 하나님(아버지=하나님=남자)과 유아적인 인간이라는 구도를 묘사하는 것이라 한다면, 하나님이라는 개념의 여러 하위 요소들을 추출하여 ‘벗으로서의 하나님’ 등,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의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고, ‘벗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은유로부터 고뇌를 함께 나누는 친구처럼 ‘고통을 함께 하는(共苦) 신’이라는 모델을 구축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맥페이그, 1983:177~192)

  이 같은 지적은 종교적 상징에 관해 틸리히(Tillich, Paul Johannes)가 “중요한 것은 하나의 표상을 다른 표상으로 바꾼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치환이 표현하는 실재 시각의 변화이다”(틸리히, 1984:17)라고 지적하고 있는 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메타포가 공통의 기반인 사회적 문맥(context)에 근거하면서 그 지시 대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이야말로 비일상적인 신비체험을 추체험할 수 있는,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다가서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비체험을 해본 사람만이 그것과 관련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런 체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메타포를 통해 그것과 관련해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현재 특정 종교의 전통 내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의와 이해가 허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근거로서 ‘성스러운 말씀’이 되고 있다. ‘문자화(文字化) 할 수 없는 말’이 분명히 특정한 사람들의 내면에서는 현실적인 묘사와 함께 늘 살아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관심은 증명보다 개념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으며, 우리가 신을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신에 관해 말하는 것 그리고 이를 은유로써 말하는 것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데에 있다. 이는 리얼리즘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역자 주) 기술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현실을 묘사하면서 어떤 비유적 표현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소스키스, 1992:257)

  소스키스는 종교 언어와 메타포의 관계로부터, 종교적 체험 그 자체가 본질적이며 또한 그 공동체 자체도 본질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지시되는 개념이 현실적인 묘사로서 확실히 독자에게 인지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말의 의미와 그 지시 관계는 사회적 맥락(context)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메타포에 의해 전달할 수 있으려면, 그 애매함으로 인해, 말의 유사성이나 관계성 등이 이미 사회에 공유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번역상, 다른 언어나 문화권의 경우 어떤 말에 대한 관계성이나 유사성이 없을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 잘못된 묘사를 해버릴 우려도 있다. 언어의 배후에 있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번역자는 사색을 거듭한다. 그것은 은유에 의한 시작(試作, 시도)이자 시작(詩作, 시 쓰기)이기도 하다.

인용문헌

  • A.J. Ayer, (吉田夏彦 옮김) 「언어·진리·논리」, 岩波書店, 1955년.
  • J.M. Soskice (小松加代子 옮김) 『메타포와 종교 언어(メタファーと宗教言語)』, 玉川大学出版部, 1992년.
  • Sallie McFague, 「Metaphorical Theology-Models of God in Religious Language」, London: SCM Press, 1983. ; 참고 「어머니 · 연인 · 친구」(정애성 옮김, 뜰밖, 2006)
  • Paul J. Tillich, (土居真俊 옮김) 「조직신학」 제3권, 新教出版社,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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