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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와 언어(1)-초기 불교의 역사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25.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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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8호(통권 224호), 2018. 8, 6쪽.


초기 불교의 역사

  불교는 약 2,500년 전에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라는 한 구도자로부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후 북인도 일대로 널리 보급되었다. 인도라는 세계를 나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장구한 시간을 거친 불교는 세계 종교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불(佛)’이란 고대 인도의 전례(典禮)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Buddha’ 즉 깨달은 자(覺者)의 한역이다. 원래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호칭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만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는 아니었다. 그는 사카족(Saka) 출신이었던 까닭에 ‘사카 무니’, 즉 “석가족 출신의 성인”이라 불리게 된다. 싯다르타라는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이하에서는 ‘석가’로 표기할 것이다.

   석가의 생애와 관련한 문헌이나 자료는 아주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과 전설 그리고 창작이 마구 섞여 있어서, 석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하는 점이 학술적으로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석가의 탄생지에 관해서는 663년 구법 여행으로 북인도를 방문했던 중국의 승려 현장(玄奘)이 “상부에 말의 조각상이 있는 무우왕(無憂王, 아쇼카 왕)이 건립한 거대한 석주(石柱)가 석가 탄생지에 있었다”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하고 있다.(현장, 1999:291) 이 아쇼카(Ashoka) 왕의 석주는 1895년 인도 국경과 가까운 네팔의 룸비니(Lumbini)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영국령이었던 인도의 고고학 조사관이었던 퓨러 박사(Führer, Alois Anton)는 그 석주에 새겨져 있던 비문을 인쇄 출판하였다.

“신의 사랑을 받은 피야다시(Piyadasi, 아쇼카)는 즉위 20년을 기념한 예배를 위해 스스로 이곳을 방문하고, 사카족의 성자인 붓다가 탄생한 이곳에 석주를 건립한다. 성자가 탄생한 이 룸비니 마을의 조세를 1/8로 경감한다.”(필자 번역)

  이 발견은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발견 이전에 석가는 전설상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 석주의 비문에 의해 다양한 면모가 실증되기에 이르렀다. 아쇼카 왕은 고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의 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B.C 268년~233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불교에 귀의한 이후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다수의 칙령을 담은 비문을 남겼다. 석가의 탄생 연대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기원전 5세기 중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인 것으로 확정되어 있다. 왕권에 의한 적극적 보호 정책으로 아쇼카 왕의 치세 기간에는 이미 석가의 가르침은 인도 전역 및 스리랑카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석가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45년간 오직 전도에 온몸(身命)을 바쳤다. 자신의 깨달음을 가장 먼저 전한 땅, 이른바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역자 주)는 불교 4대 성지로서 현재에도 여전히 불교도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의 가르침은 갈수록 퍼져나가, 비크슈(Bhikṣu, 비구)라 불리는 출가자도 증가하며 상가(Sangha, 교단)가 성립한다.

  석가는 기본적으로 출가 지상주의를 고수했던 까닭에, 석가가 설법한 단편적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교단 내에서 계율이나 실천 강령으로 정리되었다. 이와 같은 비크슈 공동체인 상가를 지원한 것은 우파사카(Upasaka, 優婆塞, 우바새, 재가 남성 신자-역자 주) 또는 우파시카(Upasika, 優婆夷, 우바이, 재가 여성 신자-역자 주)라고 하는 남녀 재가 신도였다. 출가자는 재가 신도에게 불법을 설파하고, 재가 신도는 보시(Dāna, 布施)를 통해 출가자를 지원했다.

  석가가 설법에 사용한 “말”은 당시 포교지인 갠지스강 중류 지역인 마가다(Magadha, 현재 비하르(Bihar) 주 주변)의 언어, 고대 마가다어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르나(Varṇa, 카스트 제도의 모체-역자 주)에 의한 신분제도에 기초한 사회적 질서를 설파한 브라만교의 성직자가, 일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산스크리트어로 불(fire)의 제식을 행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가는 프라크리트어(Prakrit)라고 하는, 일반인들이 말하고 있던 속어를 사용했다. 그는 일상의 “말”로 불법을 설하고, 사람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철저한 평등주의와 명쾌한 논리로 일관한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다른 차원의 신성한 것, 위엄과 권위로 가득 찬 것이라기보다는, 귀천이 없는, 근심이나 현실적 고통, 슬픔과 같은 인생의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석가와 그의 제자들에 의한 포교와 전도의 성과는 놀라워서, 석가의 가르침은 급속도로 북인도 일대로 퍼져나갔다. 브라만교라고 하는 당시 사회의 정통적 종교의 안티테제로서 확산된 석가의 “말”은, 전도 과정에서 다른 언어들로 옮겨질 필요를 느끼게 된다. 속어를 사용하며 지역적으로 전파되면서, 불교는 초기 단계부터 언어적 차이와 고투하며 이를 극복했다. 불제자 가운데에도 뛰어난 특기를 지닌 십 대 제자 가운데 프루나(Purna Maitrayani-putra, 富樓那)는 설법에 탁월했던 인물이었기에, 이후 설법 제일(說法第一)이라 불렸다. 그는 북인도 일대의 다양한 속어에도 정통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 마가다어로 말씀하신 석가의 가르침은 전도 과정에서 프루나를 필두로 한 제자들에 의해 당시 인도의 다양한 언어로 옮겨졌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변환은 석가의 가르침 그 자체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말”의 권위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브라만교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자신의 깨달음과 불법을 중요시하는 석가는 만년에 제자 아난다(Ananda, 아난 존자, 다문 제일(多聞第一)-역자 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난다여, 나는 이미 늙고 쇠하였네. 인생의 여로를 지나 노령에 이르니, 내 나이 여든이 되었네. <중략>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섬(원어로 ‘dipa’, ‘등불’로 해석할 수도 있다)으로 만들고, 자신을 의지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게. 불법을 섬으로 삼고 불법을 의지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게.”(나카무라, 1988:443)

  이처럼 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한 깨달음과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자신과 법(불법) 이외의 것에 대한 의존을 부정했다. 이러한 자세가 제자들이 다양한 언어로 적극적으로 불법을 설파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해석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말”의 여지를 불교는 그 기원에서부터 내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사에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후일 상가=승가 공동체가 분열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불교는 초기 단계부터 이미 다각화, 다양화할 가능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문헌

  •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고타마 붓다, 석존의 생애(ゴータマ・ブッダ 釈尊の生涯)」, 中村元選集 第11巻, 1988년.
  • 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第二巻, 水谷真成 옮김, 東洋文庫,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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