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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와 언어(2)-초기 불교의 "말"과 경전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2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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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10호(통권 226호), 2018. 10, 4쪽.


초기 불교의 "말"과 경전

  당시 이미 사회적 질서로 정착하고 있던 브라만교의 천계(天啓) 성전인 베다(Vedas)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구전으로만 전승되고 있었다. 베다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기원전 500년경까지 정리된 산스크리트어 성전들에 대한 총칭으로, 쉬르티(Śruti, 하늘에서부터 들려온 가르침)라고 지칭되었다. 그 내용은 특정 브라만 계급에 의해서만 전수되어, 결코 문자로 옮겨지지 않은 채 완전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었다. 현재는 베다 문헌들의 일부가 문자화 되어 출판되고 있는데, 인도 및 네팔에서는 여전히 베다의 전통적 형태인 사제 간의 낭송을 통해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천계 성전의 “말”을 절대적인 “소리”로서 신성시하며 그 종교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발음과 함께 일언반구라도 흘려듣지 않는 구전에 의한 전승이 가장 확실한 전승 방법이었을 것이다. 문자로 옮겨질 경우 잘못 적어 놓거나,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브라만의 입과 귀라는 기관, 그리고 기억 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하여 듣는 것에 의해서 전승이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은 전통은 브라만교 특유의 언어관에서 유래한다.

“끝도 시작도 없는 “영원한 것”인 브라흐만(Brahman, 우주의 근본 원리이자 실재-역자 주)은 언어 그 자체이자 불멸의 자음이다. 이로부터 현상 세계가 형성된다. 그것(브라흐만)은 의미=대상=사물(artha)로서, (이 세계에) 다양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다.”(바르트리하리, 2005:15)

  고전 산스크리트 문법학자인 바르트리하리(Bhartṛhari, 또는 Bhartrihari로 표기-역자 주)는 산스크리트라는 전례 언어를 단일한 기원적 언어로, 우주의 절대적 원리는 브라흐만 그 자체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 기원적인 “말”이 임시적(假) 형태로 분절화됨으로써 현실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세계관을 주장하였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존재인 브라흐만이야말로 “말” 그 자체이며 세계 존재 그 자체라고 하는 사상에 기초하여, 브라만교에서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자음은 영원불변의 것이자 신성한 것이어야만 한다. 즉 베다의 “말”에는 특별한 종교적 가치가 부여되어 있어서, 이는 글자로 옮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대 인도의 정통적 사회 규범으로서 생활의 기반이 되었던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탈브라만교적 인간관을 주창했던 석가도,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 특유의 브라만교적 언어관과 그 종교 전통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도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과정에서는 구전의 전승을 답습해서, 석가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 의해서 또는 제자들에 의해서도 설법을 성문화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가는 북인도 일대의 다양한 지역에서 설법했던 까닭에, 그 대상자의 언어 역시 다양했다. 또 제자가 된 사람들도 다양한 지역과 계급, 민족으로부터 모여든 까닭에 교단의 언어 역시 잡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석가는 어느 브라만 가문의 형제 출가자와의 대화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때 야멜, 테크라라는 두 비구 형제가 있었다.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말솜씨도 좋고,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중략) 이들 비구는 세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지금 비구들은 이름을 달리하며, 성을 달리하며, 태어난 곳을 달리하며, 족속을 달리하여 출가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말로 부처의 설법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존사(尊師)여, 바라건대 우리는 붓다의 말씀을 베다의 언어로 바꾸고 싶습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을 베다의 언어로 바꾸지 마십시오. 옮겨진 것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 자신의 언어로 붓다의 설법을 배울 것을 허락합니다"(나카무라, 1975:95)

  이처럼, "그대들 자신의 언어로"라는 표현에서 상가=승가 교단 내에서 각자의 모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부처의 설법(말씀)’ 즉 석가의 가르침을 각각의 모어로 학습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석가는 그러한 상황을 억지로 통일하려 하지 않았던 듯하다. 다만 베다어로 가르침을 배우고, 말하는 것은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석가는 브라만 계급을 최고 계급으로 하는 신분제도나 의례 중심의 신앙생활을 비판함과 동시에, 일반인들을 구제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까닭에 베다의 언어로 자신의 가르침이 한정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석가의 입멸 이후 직접 가르침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제자들은 각자 들었던 석가의 가르침을 모아 확인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를 상기티(Sangiti, 결집)라고 한다. 상기티는 어원적으로는 ‘낭송’ 혹은 ‘노래 부르다’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석가의 "말씀"을 함께 모여 낭송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한 편찬 회의는 수 차례에 걸쳐 열렸다고 한다. 상기티의 목적은 석가의 단편적인 가르침의 정리와 해석의 통일이었지만, 계율의 해석을 둘러싼 교단 내의 의견이 대립하여, 상좌부(sthavirāh, 上座部)와 대중부(Mahāsamghika, 大衆部)로 양분되었다. 더구나 그 후, 다수의 부파로 분열하여 불교는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로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가의 "말씀"은 입멸 이후 수백 년 후에 삼장(Tri-Pitaka, 三藏:경(經)‧론(論)‧율(律))으로 정리되었다. 이들이 팔리어(Pali)로 된 원시 불경으로, 주로 상좌부 불교에서 현대까지 보존해오고 있다.


  이 팔리어의 기원은 북인도의 서부 지역으로, 석가가 포교하고 있던 북인도 동부와는 명확히 다른 언어권이었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은 이미 번역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석가의 입멸 이후, 수차례에 걸친 상기티를 통해 다양한 가감과 첨삭이 이루어졌을 것을 고려해보면, 가장 오래된 원시 불경조차 석가의 가르침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원전이라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로서 석가는 전 생애에 걸쳐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창시자라기보다, 어떤 경우에서는 종교인이자 사상가로서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 실천을 살아있는 "말"로 설파했던 인물이다. 인도학의 석학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1912~1999)는 "후세의 경전 제작자가 불교라는 특수한 가르침을 만들어 냈다"(나카무라, 1988:464)라고 지적하고 있다.

석가의 "말씀"은 항상 세상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석가 자신의 태도와 ‘말’에는 자유로운 변환을 허용하는 탄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석가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정리된 팔리어 원시 경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씀"은 출가자만의 것이 되어 버렸고, 사상적으로 심화되었으며, 정교한 철학적 체계로서 갱신되어 갔다. 그 결과 민중의 소박한 신앙과 괴리가 발생하여 불교는 점차 경직화되고 만다.

【인용문헌】

  •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고타마 붓다, 석존의 생애(ゴータマ・ブッダ─釈尊の生涯─), 春秋社,1988년 第10刷.
  • 바르트리하리(バルトリハリ), 「古典インドの言語哲学1, 赤松明彦 옮김, 平凡社,2005년 第2刷.
  • 마에다 에가쿠(前田恵学), 原始佛教聖典の成立史研究, 山喜房佛書林, 1975년 第3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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