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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와 언어(3)-경전의 성립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4. 2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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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12호(통권 228호), 2018. 12, 4쪽.


경전의 성립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서는 바로 이전 글에서 소개한 팔리어 원시 불경을 들 수 있다. 이는 삼장(三藏, Tripitaka)이라 하는데, 상기티(Sangiti, 결집)에 의해 정리된 석가의 가르침을 정리한 수트라(경(經), Sutra Pitaka), 교단의 규율과 도덕을 정리한 비나야(율(律), Vinaya Pitaka), 그리고 이들에 대한 논리적 해설을 정리한 다르마(론(論), Abhidhamma Piṭaka)로 나뉜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수트라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경’이라고 하는 것의 종류는 이 수트라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 ‘수트라’라는 말은 불교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이전의 브라만교나 동시대의 자이나교에서도 중요시되었다. 나아가 불교 탄생 이후, 사상적으로 발전한 인도의 여러 철학에서도 그 핵심에 관한 문헌을 수트라라고 불러왔다.

  어원적으로 수트라는 ‘한 뭉치의 실’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실로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 축복이나 존경을 표하는 관습이 있다. 그 꽃목걸이에서 발전하여, 이 ‘수트라’라는 말은 중요한 말씀(金言)이나 뛰어난 문학적 표현에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브라만교에서는 천계(天啓) 경서인 베다의 주요 부문은 「슈라우타(천계란 의미) 수트라(Śrauta Sutra)」, 가정의 제례 관련 서적은 「그리야(가정이란 의미) 수트라(Gṛhya Stura)」, 인생의 규범과 도덕 등에 관한 법률서는 「다르마 수트라(Dharma Sutra)」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운문이나 산문 형식으로 정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브라만교의 수트라 전통은 불교에도 그대로 이어져, 석가의 입멸 이후 상기티를 통해 그의 가르침은 ‘수트라’로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출가자는 이 삼장의 습득에 몰두한 까닭에, 결과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구제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서 교단은 가르침에 대한 연구 기관으로서의 경향성이 짙어져 갔다. 한편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석가의 소박한 ‘말씀’에서 구원을 얻고자 한 일반인들은 점차 구원의 기반을 잃어가, 교단과 유리되어 그때까지 금기로 여겨지던 불상 숭배나 석가의 유골 숭배 형태로 발전한 불탑 건립 등, 독자적 신앙 형태를 낳게 된다.

  그와 같은 새로운 신앙 운동은 엄격한 출가주의에 기초한 상좌부 불교와는 달리, 출가자와 재가자를 불문하는 새로운 불교로 발전하여 불교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이것이 후일 대승 불교 탄생의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에서 수트라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으로 시작한다. 이는 우선 석가에게 들었던 가르침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를 표명하고, 일체의 의심을 품지 않는다고 하는 서약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 “여시아문”은 석가의 입멸 직후 제1차 상기티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진, 석가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것으로 알려진 제자 아난다가 가장 먼저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라고 자신의 기억을 술회하며 설법한 것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미즈노, 24:1990) 따라서 불교, 특히 초기 불교에서 ‘수트라’는 석가에게서 직접 들었던 설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삼장의 ‘비나야’나 ‘다르마’와는 명확히 구별되고 있다.

  한편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온 이후 불교의 한역(漢譯) 작업이 진행되어 가면서, 그러한 한역 경전으로서의 수트라는 “경(經)”으로 번역되었다. 불교 전파 이전부터 중국에서는 유교의 가르침 등을 필기한 죽편을 실로 엮은 다음, 이를 매어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때 그 실을 “경(經, 날실)”이라 부른 까닭에 경전 자체를 ‘경’이라 부르게 되었다.(미즈노, 17:1990) 그래서 한역된 불교 전적 역시 ‘경’이라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불교의 전파 초기에는 경, 율, 론 삼장의 분류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중국인 역경승들은 전해온 불교 전적 모두를 ‘경’으로 통칭하여 번역하였다.(미즈노, 17:1990)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듯 석가의 입멸 이후, 교단이 점차 변모해가면서 석가에 대한 시각 역시 변화해 갔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는 이른바 붓다(Buddha, 깨달은 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교단에서 다른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삭발을 하고, 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함께 수행하고 명상하고 있었다.(나카무라, 507:1988) 따라서 얼핏 보면 누가 석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외모는 일반 출가자와 어떠한 차이점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멸 이후 정리된 가장 오래된 경전에 표현된 석가와 비교적 최근에 분류된 경전에서 보이는 석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경전에서의 석가에 대한 존칭의 변화를 살펴보면 인간으로서의 석가의 모습이 점차 신격화해가는 과정을 알 수가 있다. 즉 경전 성립 과정에서 한 출가자의 깨달음을 통한 ‘가르침’이, 불교라는 하나의 거대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후에 화가나 조각가가 표현한 석가, 즉 광륜(光輪, gloriole)을 하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멋진 석가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로서는 오류이며, 실은 후세의 불교도가 상상해서 묘사한 석가의 이상적 모습이었던 것이다.(나카무라, 508:1988)

  그의 깨달음에는 원래 신비적 요소나 초자연적 능력 등은 없었고, 단지 ‘법’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이를 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분류되는 경전에서 석가는 제자들로부터 “샤카여”, “그대, 고타마여” 또는 “석가족의 자손(아들)이여”로 불려서,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었다.(나카무라, 487:1988) 그러다 점차 뛰어난 선배 출가자들에 의해 “인간 가운데 최상의 사람” 나아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최상자(最上者)”로 추앙되어 가고, 불교가 왕권에 의해 극진한 보호를 받았던 마우리아 왕조 시대(Maurya dynasty, 기원전 3세기경)에는 석가의 위대함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되자, 석가는 신비적 존재로서 표현되어 “신들의 신”이나 “신들을 넘어선 신” 등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다.(나카무라, 511:1988)

  이는 바로 인간으로서 깨달은 그의 가르침이 초월적 존재에 의한 영원한 진리로 승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경전 제작자에 의한 사상적 혁명을 통해, 석가라는 한 인간의 깨달음으로부터 불교라는 특수한 종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나아가 인도의 윤회 사상과 결합하여 석가의 전생에 관한 다양한 상상이 전생담(前生譚)으로 덧붙여져 ‘과거불(過去佛)’ 등과 같은 교리적 변형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경전을 개정 및 증보해 가면서 석가로부터의 직접적 전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불설(佛說)”, 즉 석가의 설법으로 엄청난 수의 경전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대승불교라는 지양적(Aufheben) 사상 체계로서 사람들에게 수용되었다.

【인용문헌】

  •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고타마 붓다-석존의 생애(ゴータマ・ブッダ - 釈尊の生涯)』, 春秋社, 1988년.
  • 마에다 에가쿠(前田恵學), 『原始佛教聖典の成立史研究』, 山喜房佛書林, 1975년.
  •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경전의 성립과 전개(経典─その成立と展開)』, 佼成出版社,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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