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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3)- 대승불교의 기원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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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12호(통권 240호), 2019. 12, 4쪽.


대승불교의 기원

  석가의 유골은 석가의 유언에 따라 무덤에 봉안되었고,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며 이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덤이 불탑으로 발전하여 이에 대한 숭배 관행 역시 퍼져나갔다. 상좌부와 깊이 관계를 맺는 팔리어 문헌인 도사(島史, Dīpavaṃsa)』나 대사(大史, Mahāvaṃsa)에 의하면 스리랑카에서도 옛날부터 커다란 탑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에서 스리랑카를 방문했던 법현(法顯, 337~422)도 불탑을 보았음을 『법현전(法顯傳)』에 남기고 있다. 따라서 대승만이 아니라 원래 상좌부 불교에서도 불탑 조성과 숭배가 행해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반열반경에 기록된 석가의 지시를 유골 숭배에 대한 경계라고 해석하여, 본래 불탑 숭배는 상좌부의 전통이 아니라는 주장을 볼 수 있다.(히라가와, 1990:272~289)

  『대반열반경의 유골 숭배 금지에 관한 석가의 지시를 새삼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우리들이 여래의 시신에 대하여(tathāgatassa sarīre)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습니까?”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의 시신 공양에(tathāgatassa sarīrapujāya) 관계하지 마세요. 그대들은 올바른 목적을 위해 노력하세요.”(시모다, 1997:98)

  위의 어구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른 견해가 도출된다. 사실 “tathāgatassa sarīre”의 “sarīre”의 의미는 본래 ‘신체’이며, 이를 시신(遺體)으로 보느냐 유골(遺骨)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또 “sarīrapujāya”의 “pujāya”의 의미를 공양(供養)으로 보느냐 숭배(崇拜)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즉 이 부분은 ‘여래의 시신에 대한 공양’ 아니면 ‘여래의 유골에 대한 숭배’라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석가의 시신 공양, 즉 석가의 장례 의식과 관련한 것을 경계했는지 아니면 석가의 유골 숭배 행위를 경계했는지라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이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납관(納棺)이나 화장(火葬) 등, 석가의 유해 처리에 관한 구체적 방법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어, 일련의 문맥은 석가의 장례 의식에 관한 문답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즉 석가는 자신의 유골 숭배를 경계한 것이 아니라, 출가자들이 장례 의식에 관여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불탑의 출현은 어디까지나 석가의 최후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의 존재 그 자체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기원은 석가의 유골이 봉안된 무덤이었으나, 발전적으로 확산된 불탑은 열반의 상징으로서 숭배의 대상으로 변모해갔다. 사람들에게 불탑은 공간적으로는 범속한 일상 공간과는 다른 성스러운 영역으로 석가의 존재를 체험하는 장소였다. 바야흐로 불탑은 석가라는 존재의 영원성을 희구하고, “살아있는 석가”를 전제로 하는 신앙을 양성하는 장이 되어갔다고 생각된다.

  전편에서 지적하였듯 구술 언어에서 서기 언어로의 전승 방법의 변화는 이미 사회에 유포된 다양한 활동을 동반한 석가의 가르침과 그의 “말”을, 순수하게 텍스트의 내부로 봉인함과 동시에 텍스트 속에 새로운 언어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익명의 경전 제작자들은 그 언어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이 전개되는 곳이라 믿어서, 끊임없이 경적 제작 운동에 관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간적으로 성역화된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에서 텍스트 내부에 성역화된 언어 공간을 갖는 경전 자체에 대한 신앙으로라는, 즉 경전 내부에서 석가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경권 신앙(經卷信仰)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불탑 건립 후 경전을 석가의 유골과 같이 봉안하여, 숭배하며 공덕을 쌓는 신앙도 점차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 과정은 인간의 신체를 동반한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한 유한한 석가를 공간적 · 시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영원한 존재로 도약시키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대승 경전이 탄생한 기원 전후는 석가의 입멸로부터 300~400년이 경과한 시기로, 초기 불교의 법멸사상(法滅思想, 말법사상, saddharma-vipralopad-역자 주), 즉 석가 입멸 후 오백 년 만에 진정한 가르침은 소멸된다고 하는 전승에서 촉발된 위기감이 점차 퍼져가던 시기이기도 해서, 불교의 존폐에 대한 위기감 역시 대승 경전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와타나베, 2011:74)

  전통적인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부연적 해석에서 진정한 석가의 가르침을 희구하며 재흥시킨다고 하는 구도자 의식이 대승불교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승불교는 불교사에서 원점 회귀(原點回歸) 운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승 교단의 기원에 대해 이전에는 유골 숭배를 경계하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준수한 상좌부와 유골 숭배를 장려한 대승이라는 대립적 구도 하에, 유골 숭배에서 발전한 불탑 숭배 재가자 그룹만 관련 지음으로써, 출가자로 구성된 전통 교단과 관련지어 생각할 논거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도 비문에서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은 AD 5세기 이후로 기원 전후에 대승 경전이 성립한 이후에도 교단의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오히려 상좌부의 각종 부파(部派)와 거의 구별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이 “대승불교에 관하여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중략> 대승은 결코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복수의 결사체였다”(G.Schopen, 2004:492 a)라고 지적하였듯이, 대승은 상좌부와 전혀 결을 달리하는 별개의 교단으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기원적으로는 대승 경전에 기초한 사상적 경향성으로 출가자 및 재가자에게 영향을 주고, 상좌부의 여러 부파가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학파로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승불교의 기원에서부터 전개에 이르는 과정은 석가의 가르침이 구두 전승으로부터 성문화 되어 가는 과정으로, 모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여 널리 전파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대승 경전 창출의 전제가 된 다양한 해석은 번역의 허가성 역시 이끌어 내는 개념적 기반이 되어, 대승 경전은 서역의 각종 언어 및 중국어로 번역되어 갔다. 그리고 한어(漢語,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대승의 교리가 한층 심화되어, 놀랍게도 인도보다 일찍 중국에서 사원과 제도를 동반한 실체적 교단으로 대승불교가 성립하였다.(시모다, 2011:44) 나아가 그 영향이 중국인 승려에 의해 인도로 역수입되어 인도 대승불교 확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승 교단의 역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의 불교 수용과 불경의 한역, 그리고 인도를 방문한 중국 역경승(譯經僧)의 영향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인용문헌】

  •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경전을 창출하다(経典を創出する─大乗世界の出現)」(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 감수, 『シリーズ 大乗仏教2 大乗仏教の誕生』, 春秋社, 2011년.
  • 와타나베 쇼고(渡辺章悟), 「대승 불전에서 법멸과 수기의 역할(大乗仏典における法滅と授記の役割─般若経を中心として)」(다카사키 지키도(高崎直道) 감수, 『シリーズ 大乗仏教2 大乗仏教の誕生』, 春秋社, 2011년.
  •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 『初期大乗仏教の研究Ⅱ』, 春秋社,1990년. ; 『인도 불교의 역사』 ·, 이호근 옮김, 민족사, 2004.
  • G. Schopen, “Mahāyāna”, R. Buswell(ed.),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2004. ; 대승불교 흥기 시대 인도의 사원 생활』,  오다니 노부치요·임은정 옮김, 운주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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