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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4)- 도래승(渡來僧)과 역경(譯經)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1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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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2호(통권 242호), 2020. 2, 5쪽.


도래승(渡來僧)과 역경(譯經)

  간다라(Gandhara) 지방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 불경 사본의 단편에는 전통 상좌부 부파의 문헌 사본과 함께 반야경(般若經) 등 대승의 문헌으로 알려진 사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단편은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AD 1~8세기 경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지역에서 부파 불교와 대승 계열의 필사본 단편이 동시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대승 교리가 그 기원에서 대중부(大衆部),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법장부(法藏部) 등의 전통 부파 출가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단편에 대해 조사한 리처드 살로몬(Richard G. Salomon)은 잠정적이긴 하지만, 대승은 주류 불교와 공존하며, 전통 부파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전통 부파는 석가의 유훈에 따라 율장(律藏)을 따르며 출가자의 생활 전반을 규정하고 있었다. 중국 불교에 율장이 결여되어 있음을 한탄한 많은 중국 승려들은 인도에 대승 교단과 대승 율장이 있다고 추측하고 대승 율장을 찾아 인도로 건너갔다. 그 중 한 명인 법현(法顯, 337~422)은 399년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인도에 겨우 이르렀으나, 대승 율장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중부의 율장을 대승 사원에서 입수하여 돌아왔다. 이로 볼 때 대승의 교리가 주류인 승원 내에서도 전통 부파에 속하는 율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당시 인도에서 율장은 여전히 율사(律師)에 의해 구두로 전승되는 경우가 많은 데다 대승 교단 자체도 아직 독립된 교단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까닭에, 독자적 율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671년 해로를 통해 인도로 향한 의정(義淨, 635~713)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대중부(大衆部)・상좌부(上座部)・근본설일체유부(根本説一切有部)・정량부(正量部)의 사부 안에 대승과 소승의 구분이 정해져 있디 않다(四部之內,大乘小乘區分不定)”고 기록하고 있어서, 이로부터 전통 교단 내에 대승과 소승(부파 불교)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으며, 대승이 조직이 아니라 사상으로서 전통 교단 내부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승이라는 명칭은 전통 부파가 자칭한 것이 아니라 대승 측이 가한 그들에 대한 멸칭(蔑稱)으로, 법현이나 의정을 필두로 한 중국 승려들이 대승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 전후에 이미 대승 교단이 조직되어 초기부터 불경의 한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듯하다. 인도계 언어들을 직접 이해할 수 없었던 중국 불자들에게 불경 한역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문헌학적으로 보면 대승 불경이 창작된 1~2세기에 중국에서 이미 역경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승 불경의 창출과 한역 시기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역 불경에는 인도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불경보다 더 오래된 교리 등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마저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프라크리트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만을 원시 불경으로 칭하는 것은 오류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조직화가 중국에서 인도보다 일찍 진행되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해보면, ‘인도에서 중국으로’라는 흐름만이 아니라 역으로 ‘중국에서 인도로’의 사상적 영향 역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근 고대 한역 불경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도와 중국은 공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넘어서는 매체가 되었던 것이 역경(譯經)이었다. 불교의 동점(東漸) 이후 한역을 통해 고대 인도의 불교 사상은 중국에서 교량 노릇을 하여, 두 지역 간의 사상 교섭이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불교 전래는 후한 영평(永平) 10년(서력 67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이전인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미즈노, 1990:130) 그렇기는 하나 전래 당시는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이민자나 상인이 그 담당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그들은 중국에서도 모국어인 서역의 언어로 교리를 이해하고 신앙하고 있다가, 2대 3대로 세대를 거치면서 모국어로 의사소통이 점차 곤란해지자 중국어로 교리를 전승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불교에 대한 관심이 이미 중국인에게도 퍼져나가, 불경의 한역이 점차 요청되기에 이르렀다. 불경 한역의 기원에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주해온 도래인 집단의 세대 간 신앙 전승과 한인의 불교 이해에 대한 요청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한역이란 문자 그대로 고전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한역은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뤄양(洛陽)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번역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섭마등(가섭마등의 별칭-역자 주)은 카샤파 마탕가(Kasyapa Matanga)라는 인도 이름의 한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신화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로서는 환제(桓帝, 재위 146~167) 시대에 뤄양에서 역경 작업을 시작한 안세고(安世高, 148~180)가 최초의 한역 번역자라 할 수 있다.(후나야마, 2015:22~24)

  안세고의 ‘안’은 그가 안식국(安息國, Parthia) 출신임을 의미한다. 그는 안식국 국왕과 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어린 시절부터 모든 학문에 재주를 보인 초인적 재능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안식국은 이란 계열의 국가로 당시 중국과 교역이 활발하였다. 그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자로서 수도 생활을 하다가 중국으로 넘어와 역경승으로서 활약하였다. 안식국에서는 이란계의 언어뿐만 아니라 인도계의 언어 역시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는 인도계 불경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어에 대한 지식 역시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그는 불경 한역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인의 불교 지식이 부족했던 까닭에 한역 작업 당시 중국인 협력자의 교리적・언어적 지원은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인도의 각종 언어와 중국어 간의 차이도 영향을 미쳐서 그의 번역에는 다양한 변화와 우여곡절이 엿보인다.

  예컨대 같은 술어에 대해 다양한 번역어를 사용하는 번역상의 혼란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한역의 곤란함에서 오는 그의 고심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다만 후에 편찬된 고승전(高僧傳) 등에서 그를 신비한 성인으로 숭상하는 묘사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의 공헌은 후대의 역경승에게 큰 격려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번역 불가능한 언어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어를 고심하여 적극적으로 중국어로 변환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교리 해석의 측면에서 후대 역경승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는 대승 경전이 성립하기 이전의 전통적 경전을 다수 번역하고 있어서, 문헌학적 측면에서도 초기 대승 불경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이처럼 중국에서 역경 작업은 중국인이 아니라 먼저 인도 언어에 정통한 안세고 등 서역에서 온 도래승에 의해 시작되었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차이를 갖는 두 지역을 잇는 실크로드에 위치한 서역의 출가자들은 전도의 매개자로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중국에 건너와 역경 작업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들의 번역문에는 이국땅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不惜身命) 전도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각오와 삶이 새겨져 있다.

【인용문헌】

  • 후나야마 도루(船山徹),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仏典はどう翻訳されたのか─スートラが経典になるとき)』, 岩波書店, 2013년.
  •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경전의 성립과 전개(経典─その成立と展開)』, 佼成出版社, 1990년.
  • M.Allon and R.Salomon, New evidence for Mahayana in Early Gandhara, The Eastern Buddhist, vol.41-1, The Eastern Buddhist Society, Kyoto,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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