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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5)- 역경(譯經)의 역사와 그 배경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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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4호(통권 244호), 2020. 4, 5쪽.


역경(譯經)의 역사와 그 배경

  후한 시대에 안세고(安世高)로부터 시작된 한역은 북송(北宋)에 이르기까지 약 천년 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안식(安息, 파르티아(Parthia)), 월지(月氏), 강거(康居, 소그디아나(Sogdiana)), 쿠차(龜茲, Kucha) 등 중앙아시아 출신의 출가자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한역에 종사하였다. 당시에는 출신지를 이름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안식국 출신의 안세고, 월지 출신의 지루가참(支婁迦讖, Lokaksema), 강거 출신의 강맹상(康孟詳) 등 도래승의 이름으로 그들의 출신지를 알 수가 있다.

  인도에서 북으로 향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불경은 그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서역에서 도래승이 많은 불경을 중국으로 가져와 인도 지역의 언어뿐만 아니라, 서역의 언어로 번역된 불경도 한역되기에 이르렀다. 또 그들이 암기하고 있던 구전 역시도 중국에 전해져 한역되었다.

  중앙아시아의 도래승에 의해 시작된 한역은 중국에서 불교 수용의 토대가 되어, 그 가르침이 점차 수용됨으로써 중국인 불교도 역시 한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약 천년에 걸친 역경의 역사에는 수많은 역경승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4세기에 활약한 쿠차 출신의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과 7세기에 활약한 중국 승려 현장(玄奘, 602~664) 두 사람은 뛰어난 공적을 남긴 역경승으로 특히 유명하다.


  역경사는 구역(舊譯) 시대와 신역(新譯) 시대로 크게 양분된다. 이 두 시대는 현장을 경계로 삼는데, 현장보다 이전 시기를 구역, 현장 이후 시기를 신역 시대로 구분한다. 이는 현장이 그때까지의 한역을 쇄신하여 새로운 번역론을 세운 까닭인데, 그의 번역은 이후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구역 시대를 다시 나누어 구마라집 이전 시기를 고역(古譯) 시대, 구마라집 이후를 구역(舊譯) 시대로 양분하기도 하는데, 본고에서는 편의상 구역과 신역이라는 시대 구분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해보고자 한다.

  역경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역경승에 의해 한역된 내용을 분석, 비교하는 불경의 내관(內觀)이라는 관점이다. 또 하나는 역경과 역경승의 사적이나 번역 상황 등을 기록한 경록(經錄)(경전 목록)을 기초로 이해하는 불경의 외관(外觀)이라는 관점이다.

  문헌학적 고찰이란 측면에서 불경의 외관이라는 관점은 인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경을 통시적으로 외부에서 파악하고 논술한 기록이 인도에선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연호가 명기된 기록이 제작된 까닭에, 이들은 역사적 자료로서 유용하다. 본고에서는 불교의 수용과 변천의 역사를 풀어헤치기 위해 불경의 내관으로서 불교 언어의 한역 과정에 주목하면서,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이라는 경록을 통해 외관을 이해하여 역경사의 여러 모습을 조감해보고자 한다.

  4세기에 석도안(釋道安, 314~385)이 편찬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은 후한부터 서진(西晉) 시대에 걸쳐 번역 출간된 약 639부의 경전을 망라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산실 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때문에 정리된 경전 목록으로는 6세기 초엽에 편찬된 출삼장기집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책은 양나라의 학승 승우(僧祐, 445~518)가 편찬한 것으로 경전의 이름과 번역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 경록에는 석도안이 정리한 『종리중경목록』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의 공적을 어느 정도 엿볼 수가 있다.

  경록이 편찬된 배경에는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엄청난 한역 불경을 낳은 중국 불교 특유의 문제가 존재한다. 한역이 시작될 무렵 중국인에게 불교는 아직 이질적인 것이었고, 그 가르침을 이해할 기반이 정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불경의 언어가 한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인에게 번역어를 통해 미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국인의 사유방식은 노장사상이나 유교 등 기존의 전통적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완전히 다른 인도 사상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인도적 사유에 근거한 불교가 지닌 교리 개념을 중국인이 이해하기에는 문화적 · 사상적 틈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틈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가 중국에서 불교 전파의 초기 단계의 과제였다. 이는 불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질적 문화권으로의 전도를 시도하는 종교에게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불문하고 피할 수 없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초기에는 중국인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기존의 중국 사상을 가져와 불교를 이해시키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이는 번쇄한 인도 불교의 가르침을 유사한 노장사상 등 중국의 전통 사상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불교 이해를 ‘격의 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이 격의에 관해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 1870~1945)는 “불교를 해석함에 노장으로써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불교는 불교 본래의 정신을 발휘할 수 없었으니 <중략> 불교는 오히려 노장사상에 습합(習合)되어 버렸다고 봐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도키와, 1941:4) 노장사상에서 전해져 온 가르침이나 술어 등을 사용해 소화, 흡수한 중국식 불교 이해는 불교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 또는 변화시킨 것으로, 인도 불교의 정통 해석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불교 수용 초기 단계에서, 특히 지식 계급에게 한역 불경을 수용토록 했다는 점에서 격의 불교는 편의적 수단으로써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극단적인 중국적 불교 이해는 불경 그 자체에도 영향을 주어, 석가가 노자의 환생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을 담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등 전통 교리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경전들도 제작되기에 이른다.(미즈노, 1990:136) 이와 같은 경전을 ‘위경(僞經)’ 또는 의경(疑經)이라 부르는데, 중국에서 불교 수용을 촉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역경의 역사 배후에는 다양한 계통의 다양한 불경이 무작위로 전래된 중국 특유의 사정이 있다. 비록 같은 불경이라 해도 전래 시기에 따라 차이가 존재해서 매우 혼잡했던 것 같다. 이들은 한역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잡다한 전적 군을 이루어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가 중국에 침투함에 따라 점차 올바른 불교 이해를 바라는 중국인 불교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격의 불교를 배척하고 격의적 사상 구조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선 상술한 경록이 편찬되었고, 한역 불경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번역자나 번역어, 전래 시기가 다른 방대한 불경 정보를 정밀하게 비교·조사하여, 그 내용을 음미하여 수준과 진위를 결정하는 매우 어려운 지적 조작, 이른바 “교판(敎判 또는 교상 판석(敎相判釋))”을 하는 것이었다.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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