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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7)- 중국의 불경 수용과 격의(格義)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2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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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8호(통권 248호), 2020. 8, 5쪽.


중국의 불경 수용과 격의(格義)

  중국에서의 불교 교리의 변용은 의경(疑經)의 침투만이 아니라 불경의 한역 과정에서도 진행되었다. 한역이란 기점 언어인 인도의 여러 언어로부터 목표 언어인 중국어(=한문)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도의 언어에 인도 고유의 사상과 종교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어에도 중국 특유의 문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단일한 방향의 직선적 형태로는 한역을 설명할 수 없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노자(老子)』나 『장자(莊子)』 등 옛 전통 사상의 소양을 토대로 불교를 이해하였다. 이 수용 과정에는 앞서 언급한 고전들에서 공통된 부분을 실마리 삼아 전래된 불교 경전을 해석해 나가는 사상적 필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 혹은 그 토대에서의 작업을 “격의(格義)”라고 하며, 이에 기초한 불교를 “격의 불교”라고 한다. 올바른 의미(義)를 헤아린다(格=量), 또는 옳은 의미를 궁구 한다(格=致)는 의미의 격의는 배설(配說)이라고도 불린다. 니원(泥洹) · 열반(涅槃) 즉 니르바나(nirvāṇa)는 『노자』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인 ‘무위(無爲)’와 짝을 이뤄 설명되었으며, 재가 신도가 준수해야 할 오계(五戒, pañcaśīla) 즉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음주(不飮酒) · 불사음(不邪婬) · 불망어(不妄語)는 유교의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으로 설명되었다.(고바야시, 1997:296) 또 석가의 깨달음인 “각(覺, bodhi)”은 “성도(成道)” 등 ‘도(道)’를 이용한 번역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인도 언어의 의미에서 보면 이 ‘bodhi)’는 눈뜸, 자각을 의미하기에 ‘도(道)’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한역에서 ‘도(道)’가 많이 사용된 이유는 노장 사상의 최상위 개념으로서의 ‘도(道)’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격의 사례는 불교의 구원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가는 모든 현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무자성(無自性)으로, 서로 의지해 생겨남을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로 설명하였다. 한역 초기에 안세고(安世高)는 이 교리에 대하여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 원인으로 구별하여 각각 인(因)과 연(緣)으로 나누어 “인연”이라 번역하였다. 안세고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번역하여 현재의 삶이 과거에 의해 규정되며 나아가 미래는 현재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의 인과 관계에 대한 불교의 독자적 구원관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된 초기 단계에서 실제 중국에 정착한 사상은 이 세계 모든 존재 일반의 연기나 전세, 현세, 내세를 윤회하는 삼세의 인과 관계가 아니라, 현세와 내세에 국한된 인과응보 사상이었다.

  이는 불교 전래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도교의 윤리인 공과(功過) 사상, 즉 하늘은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여 선행을 했을 시에는 상을, 악행을 했을 시에는 벌을 내린다고 하는 사상이 근저에 있었으며, 그 연장 선상에서 윤회 · 연기 등의 교리를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가와노 사토시는 지적하고 있다.(가와노, 1992:64) 이 ‘인연’이라는 번역어는 이후 ‘연기’로 고쳐졌고, 그 교리 개념은 수정되어 갔다.

  또 인도에서 들어온 교리인 “공(空, śūnya)” 사상은 노장 사상의 개념인 ‘무(無)’에 빗대어 설명되었다. 공 사상의 근간은 일체가 연기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실제로는 이들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자성이다. 한편 노장사상에서는 이 세계를 무(無)와 유(有)로 상정하고, 그 상호 유기적 관계에서 세계를 일원적으로 파악하여 만물의 근원으로 ‘허무(虛無)’를 위치시킨다. 양측은 사상적으로 공통되는 부분도 있어서, 특히 육조 시대에는 노장의 ‘무(無)’ 개념으로 불교의 공 사상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양자에는 ‘공’ 혹은 ‘무’라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진(精進)의 필요 유무라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노장사상에서는 허무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단지 인위(人爲)를 그만두는 것만으로도 된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모리, 1969:139) 그러나 불교 출가자에게는 세속을 떠나 엄격한 계율에 기초한 금욕적 생활이 부과되어, ‘공’을 깨닫기 위해서는 정진이 필요하므로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 격의를 교리의 수용과 변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인도의 여러 언어로부터 한역된 불교 언어가 인도 언어의 의미와 중국어의 의미 사이에서 흔들리며 전개 · 침투해온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번역에는 어의(語義)의 이중성에 의한 불명확함이 발생하는 틈이 존재하고, 그 틈에서 어의 결정은 항상 흔들리게 된다. 종교 문헌을 번역할 경우 그 틈새는 바로 교리의 수용과 변용의 틈과 다름없다. 한역 초기 번역자는 중국인의 교양에 중점을 두고 그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격의적 번역을 했던 까닭에 어의는 인도 언어의 어의로부터 멀어져, 결과적으로 교리의 변용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안(道安, 312~385)은 격의로는 정통적 불교 이해에 이를 수 없다며 한역에 기준(規矩)을 부여하여 격의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경록(經錄)』을 편찬하였으나, 그의 소양 자체도 『노자』, 『장자』, 『주역』이라는 세 가지 현학(玄學)으로 구축되어 있어서, 중국 고유의 사상과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를 해석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계(戒)란 예(禮)와 같다”(大正藏五五, 八〇中)고 했고, 또 중국 고전에 정통한 제자 혜원(慧遠, 335~417)에게는 『장자』의 언어를 기초로 설법하는 것을 허락했다.(고바야시, 1997:300) 즉 격의를 비판했던 도안조차 격의가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격의에 의한 번역을 통해 외래의 가르침인 불교를 일상생활 속에서 중국인이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격의는 불교 수용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고, 나아가 번역이라는 작업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격의도 결코 부자연스러운 방법론은 아니다. 오우초 에니치(横超慧日, 1906~1996)가 “당시 사회에서 도가나 유가의 서적이 문화인의 교양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불교 사상을 소개 · 해설하는 데에 외전(外典)에 의탁하는 방법이 꽤 유효했을 것이 확실하다”(오우초, 1958:204)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중국인의 내면에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격의가 교리를 변용시켜버리고 만다는 위기감과 문제의식을 지닌 최초의 인물로서 도안은 중국 불교사에서 드문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그는 더 정통적인 교리 이해를 원해서 당시 이미 서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을 중국에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안이 사망하고 16년 후인 401년, 구마라집은 후진(後秦)의 제2대 황제 요흥(姚興, 재위 394~416)의 영접을 받아 장안(長安)에 이르러 한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후 중국 역경사에서 구마라집의 활약을 보면 도안의 공적은 특필할 만하다고 하겠다.

  번역에서는 어의의 이중성으로 말미암은 ‘흔들림’이 늘 따라다닌다. 도안은 그 문제를 의식할만한 신앙적 태도를 익힌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그의 그러한 태도에서 미지의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구도자로서의 성실하고 정직한 인품이 엿보인다.

【인용문헌】

  • 오우초 에니치(横超慧日), 『中国仏教の研究 第一』, 法蔵館, 1958.
  • 가와노 사토시(河野訓), 「中国に於ける縁起思想の受容」, 『宗教研究』 66권 2호 통권 293호, 1992, pp. 47~69.
  • 고바야시 마사요시(小林正美), 「格義仏教考」, 高崎直道 외 편, 『シリーズ・東アジア仏教 3 新仏教の興隆』, 春秋社, 1997.
  • 모리 미키사부로(森三樹三郎), 『「無」の思想』, 講談社, 1969. ; 중국 사상사』, 조병한, 서커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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