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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9)- 구라마집과 불경의 한역 1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2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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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12호(통권 252호), 2020. 12, 5쪽.


구라마집과 불경의 한역-1-

  중국 역경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 쿠차(龜玆, Kuchar) 출신의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이다. 그는 401년부터 장안(長安)에서 십 년 가까이 머물며 35부 294권의 불경을 번역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출신의 구마라염(鳩摩羅炎, Kumārayana)으로 원래 국상(国相, 정승-역자 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 지위를 잇지 않고 출가하여 쿠차로 이주하였다. 쿠차 국왕의 존경을 받아 왕의 여동생 기파(耆婆, Jīva)의 청혼으로 환속하여 결혼했다. 구마라집의 이름은 관례적으로 라집(羅什)으로 약칭하지만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Kumāra’와 ‘jīva’의 복합어로, 각각 ‘구마라’와 ‘집’으로 음차한 것으로 이를 ‘구마’와 ‘라집’으로 구분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중국 역경사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번역어가 일단 정착하게 되면 원문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어 본래의 어의(語義)가 무시되는 점을 들 수 있다.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라집’으로 약칭되는 것도 그 전형적 예일 것이다.

  그런데 위대한 번역가로 대성한 구마라집의 생애를 좌우한 것은 그의 성장 과정과 유소년기의 교육이었던 것 같다. 모친의 권유로 그는 7세에 출가하여 9세부터 불교 연구의 일대 거점이었던 카슈미르(Kashmir)에서 교리 연구에 열중하였다. 당시 카슈미르는 상좌부계열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학풍이 최고조이던 시절로, 그는 정교한 이 이론을 학습하여 불교를 부정하는 외도론자(外道論者)를 토론에서 압도하는 실력을 갖췄다고 한다.(오우초, 1991:139) 12세에 쿠차로 돌아오는 길에 카슈미르에서 대승불교의 논사(論師)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 Sūryasoma)를 사사하며 대승이라는 새로운 불교와 만나게 된다.(가노, 2008:22) 이 만남이 그의 불교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을 개념적으로 고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이론을 전개하지만, 대승에서는 현상계의 모든 것을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으로 보며,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존재하는 공(空)으로 본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의 논리처럼 모든 것을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오류이며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카슈미르에서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습득한 뒤, 그 가르침을 근저에서부터 뒤집는 대승의 교리와 만난 구마라집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12세 소년이 이러한 학문적 충격과 신앙적 갈등을 경험한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 경험은 믿음과 앎 두 측면에서 큰 시련이었지만 이를 극복했던 까닭에 구마라집은 위대한 공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쿠차로 돌아온 구마라집은 “내가 옛날 소승을 배운 것은 비유컨대 타인이 가진 금을 알지 못해서 유석(鍮石, 놋쇠-역자 주)을 귀하게 여긴 것과 같다”(오우초, 1991:149)라고 하며 대승으로 전향하여 『반야경』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 무렵 쿠차에서는 기구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83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쿠차에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하였다. 그 결과 쿠차는 멸망하였고 구마라집은 포로가 되었다. 이미 학식과 재주로 명성을 얻고 있던 구마라집을 익히 알고 있던 부견은 장군 여광(呂光)에게 구마라집을 잡아서 장안으로 데려올 것을 명하였다. 사실 부견에게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초빙할 것을 촉구했던 것은 중국 불교계의 영수였던 도안(道安)이었다. 도안은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자리 잡길 바라고 있었던 까닭에 이미 서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구마라집이 중국에 넘어오길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견은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에게 토벌되어 여광은 장안으로 돌아지 못하고 양주(涼州)에 머물게 되었고, 구마라집도 이를 따랐다. 이후 양주는 401년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에 의해 복속되었다.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國師)의 예로써 장안으로 맞았다. 약 20여 년에 걸친 포로 생활을 거치며 구마라집은 왕조의 비호 아래 장안에서 불경의 한역 작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대승불교를 부흥시킬 인물로 구마라집의 활약을 갈망했던 도안은 이미 16년 전에 사망했던 터라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구마라집은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산스크리트어에 익숙했고 불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배웠으며 브라만교의 성전 『베다』와 그에 부수되는 문법학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쿠차 출신임에도 산스크리트어에 관해서는 모국어 화자와 같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오랜 기간에 걸친 포로 생활에서 서역의 각종 언어와 중국어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어린 시절부터 영재 교육을 받아서 상좌부 교리를 습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승 교리에도 익숙했다. 번역에서 필수 불가결한 어학적 소양과 전문 지식 양면을 겸비한 석학이 드디어 장안에서 한역을 선도하게 된 것이다. 구마라집 이전에도 서역으로부터 도래승(渡來僧)이 불경의 한역에 종사하였으나 그들은 거의 중국어에 정통하지 못했던 까닭에 다수가 구술에 의한 번역이었다. 국가적 사업으로 한역을 하는 역장(譯場, 역경장-역자 주)에서는 원문을 읽고 이에 대해 강의하는 역주(譯主), 이를 중국어로 통역하는 전역(傳譯), 이를 다시 받아 적는 필수(筆受) 등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었다. 심지어 역장에는 출가자 및 재가 신도들이 청중으로 참가하여 원문에 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때로는 청중이 역주에게 질문하고 응답도 이루어졌던 까닭에 교리 전달의 귀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마라집의 역장 역시 그러한 다수가 참가한 공개된 역장으로 수백 명이 모인 일종의 법회(法會)가 되었다고 한다.(후나야마, 2013:56)

  구마라집은 전역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손에 쥐고 탁월한 능력으로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중국어로 구술하였으니, 참석한 청중들은 구마라집의 목소리를 듣고 인도에서 전래된 과거의 텍스트가 현실의 살아있는 말로 부활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말과 글의 관계에 대해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소리, 음성, 어조, 언술(言述)과 같은 것은 나에게 있어 흔적의 제 현상, 에크리튀르(écriture)의 제 현상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데리다, 도요사키 옮김, 2016:8 ) 극장으로도 비유할 수 있는 구마라집의 역장은 경전에 기록된 에크리튀르가 그를 매개로 구술되는 파롤(parole)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감 있게 현현되는 “성스러운 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풀어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석가가 설파하는 “성스러운 말씀”처럼 청중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인용문헌】

  • 오우초 에니치(横超慧日), 『羅什』, 大蔵出版, 1991.
  • 가와노 사토시(河野訓), 『中国の仏教受容とその展開』, 皇学館大学出版部, 2008.
  • ジャック・デリダ, 豊崎光一 옮김, 『翻訳そして / あるいはパフォーマティヴ』, 法政大学出版局, 2016.
  • 후나야마 토루(船山徹),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仏典はどう漢訳されたのか)』, 岩波書店,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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