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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12)- 구마라집과 그의 제자들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2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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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6호(통권 258호), 2021. 6, 4쪽.

 


구마라집과 그의 제자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은 한역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 제자를 길러냈다. 그에게 사사한 문하의 수는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은 구마라집과 함께 한역에 종사하면서 역장(譯場, 번역장)에서 함께 논의에 참여하면서 기존 한역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또 필수(筆受, 구술을 받아 적는 사람-역자 주)로 참여하여 구마라집의 구술을 더욱 세련된 중국 문장으로 만들어 냈다. 그들은 한역 작업을 통해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중국에서의 불교 수용에 공헌하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수제자인 승조, 도융, 도생, 승예는 사성(四聖)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승조(僧肇, 384~414)는 젊은 시절에 구마라집을 사사하였다. 그는 조론(肇論)을 저술하여 구마라집이 들여온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의 반야 교학을 노장사상의 용어를 사용하여 중국적 맥락에 맞춰 재해석하여 중국에 정착시키려 했다. 그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조론(肇論)』)에서 반야는 지자(知者)와 피지자(被知者)라고 하는 대립을 떠난 것으로, 반야에 지혜는 없다고 보았다.(이시이, 2019:72) 승조는 반야를 일반적인 개념지(槪念知, 분별지-역자 주)와 구별하여 특수한 인식 기능으로 파악함으로써 앎과 알지 못함의 상대성을 초월한 완전한 일체지(一切智)로 보았다.

  도융(道融)은 인도에서 온 브라만과의 논전에서조차 상대를 논파하여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가마타, 1983:305) 구마라집은 법화경(法華經) 번역 당시 도융에게 법화경의 내용을 강론토록 했다. 이를 들은 구마라집은 “불법을 일으킬 사람이 도융이다(佛法之興融其人也)”라며 그 내용을 절찬했다고 한다.

  도생(道生, ? ~ 434)은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 「선불수보(善不受報)」, 「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 「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 등 당시 중국에서 알려진 학설을 부정하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했다. 구마라집에게 '공' 사상을 배운 도생은 만물의 근원에 존재하는 도리, 보편적 진리를 “리(理)”로 규정하고, 존재의 부정에 관하여 “유(有)”와 “무(無)”를 각각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인 “리”의 현현이며 그 “리”를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교 개념인 “불성(佛性)”을 중국의 사상 개념인 “리”로써 이해했다. 이 “리”에 의한 불교 이해는 도가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도생의 사상을 격의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이토, 1992:187) 그는 모든 불교 경전을 정리하기 위해 재가 신자를 위한 「선정 법륜(善淨法輪)」, 상대(성문 · 연각 · 보살-역자 주)에 따라 삼승(三乘)을 설한 「방편 법륜(方便法輪)」, 성숙한 사람에게 진실을 밝힌 법화경의 「진실 법륜(眞實法輪)」, 열반 직전에 불성을 설한 열반경(涅槃經)의 「무여 법륜(無余法輪)」을 각각 분류하였다.(이시이, 2019:78) 경전의 상호관계와 그 위치에 관해 주목한 도생의 작업은 교상판석(敎相判釋, 경전의 분류 및 평가-역자 주)의 선구가 되었다.

  승예(僧叡, 378~444?)는 도생과 마찬가지로 경전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는데 유의(喩疑)를 써서 법화, 반야, 니원(泥洹, 열반) 삼경의 차이점에 관한 독자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반야경은 중생의 허망함을 제거하고, 법화경은 일구경(一究竟)을 드러내 보이며, 『니원경』은 부처의 진실한 교화를 드러내는 것으로, “뛰어남과 열등함은 사람에게 있고,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의 깨달음에 있다”라면서 삼경의 상호 우열을 부정했다.(가마타, 1983:301) 사실 이 세계의 만물 일체는 ‘공(空)’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설한 반야경과,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깃들어 있으며 열반은 영원불멸이라고 설파한 『니원경』은 내용적으로 대립하는 까닭에 상호 모순으로부터 불성의 해석과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이 종종 일어났다. 다양한 경전이 무작위로 전래되고 수시로 번역되어 단편적으로 유포됨으로써 서로 병존하고 있던 중국 불교의 특수한 상황을 승예는 염려하였다. 그의 저작을 통해 각각의 경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각 경전이 설파한 교리에 어떠한 위상을 부여하여 중국 불교로서 수용 · 체계화할 것인가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서의 불교 수용과 변용의 협간에는 교리의 체계화라는 단층이 엿보인다. 승예는 유의 속에 구마라집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십여 년에 걸친 석존의 설법은 모두 진실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해탈이라는 참된 이익을. <중략>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다양한 것은 ‘수의(隨宜)’인 까닭이다. 즉 각각의 설법은 기근(機根, 각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받아들일 능력-역자 주)에 차이가 있는 중생에 맞추어 행해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如來)는 삼매(三昧)의 가르침으로써 교화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취지를 이해한다면 모든 설법은 의미 있는 깊은 가르침인 것이니, 일부만 고집하여 다른 것을 부정하는 등의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호리우치, 2010:113~114)

  모든 경전에 정통했던 구마라집은 고르지 않은 교리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경전 전체를 조망하여 파악함으로써, 각각의 경전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에 따라 진가의 발휘 여부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응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각 경전의 의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일부 경전에 대한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마라집의 통달한 경전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의 뛰어난 제자들은 중국 불교라는 구조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각각의 경전에 대한 이해를 구현하는 학문적 태도를 익혔다.


  이러한 사상적 성숙은 한역 불경을 통해 교리가 사상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용되고, 중국적 불교로 심화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심화는 '라집교단(羅什敎團)'이라고도 불리는 구마라집 일문(一門)의 중국인 역경승(譯經僧)의 노력으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의 출신지는 다양했지만 구마라집을 경모 하여 각지에서 뛰어난 인재가 장안으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구마라집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한역 작업을 통해 각각의 재능을 펼치게 되었다. 그들이 남긴 「경서(經序)」와 주석을 보면 구마라집은 번역자로서만이 아니라 사상가로서 제자들을 지도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포교와 번역의 관계를 고찰할 때 경전이라는 실제적 성과뿐만이 아니라, 그가 역경을 통해 다수의 제자를 길러내어 우수한 역경승을 배출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또한 다른 역경과 비교하면 구마라집의 역경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의 융숭한 지원 아래 진행된 국가적 사업이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요흥은 굳건한 패트런(patron)으로서 구마라집의 활약에 큰 기대를 보였다. 그의 정치적 ·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구마라집도 천부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의 번역 역시 이만큼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구마라집의 역경 작업은 우수한 제자들의 지원과 강력한 보호자의 존재라는 좋은 조건으로 말미암은 중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대사업이었던 것이다.

【인용문헌】

  • 이토 다카토시(伊藤隆壽), 中國佛敎の批判的研究, 大藏出版, 1992.
  •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中国仏教史』 2권, 東京大学出版会, 1983.
  • 이시이 고세이(石井公成), 『東アジア仏教史』, 岩波書店:岩波新書, 2019.
  • 호리우치 신지(堀內伸二), 「羅什三蔵とその弟子の教判論」, 仏教の東伝と受容 / 新アジア仏教史 6권, 佼成出版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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