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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13)- 현장(玄奘)의 구법 여행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5. 3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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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8호(통권 260호), 2021. 8, 5쪽.


현장(玄奘)의 구법 여행

  중국 역경사(譯經史)에서 구마라집과 함께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자가 현장(玄奘, 602~664)이다. 역경사에서는 현장보다 더 이른 시대를 구역(舊譯) 시대, 현장 이후를 신역(新譯) 시대로 구분한다. 구마라집이 사용한 불교 용어는 한자 불교권에서 아직도 많이 사용되고 있고 그 질적 측면에서 그의 공적은 위대한 것이지만,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수는 구마라집의 네 배를 넘어서 수량의 측면에서는 발군이다. 이 두 인물의 번역을 비교함으로써 역경사를 포교의 관점에서 개관해 보고자 한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법화경(法華經)』과 반야경(般若經)』 등 주로 초기 대승불교 경전으로, 보다 실천적인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를 전하는 데에 유용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것이 포교에 효과적이어서, 이 한역 불경에 의해 시대에 맞는 교리 이해가 침투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수(隋) 시대에 들어서자 「여래장(如來藏)」과 「유식(唯識)」 등, 보다 사상적 색채가 짙은 중기 대승불교가 주류가 되어 점차 그 교리 연구의 필요성이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교 사상의 과도기에 탄생한 인물이 바로 현장이었다.

  생가가 궁핍했던 까닭에 유소년기에 출가한 현장은 11세 경에 법화경』과 유마경(維摩經)』을 완벽하게 암송하고, 15세부터 본격적으로 교학을 배워 그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우면서 중기 대승불교의 유식(唯識)을 중심으로 한 철학 이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후 중국 각지의 고승에게 배움을 청하여 교학에 정진하였으나 자신의 연구가 막다른 길에 이르자, 점차 그는 한역 불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천축(天竺)에서 직접 원전에 맞는 교학의 온오(蘊奧)를 연구해보고자 뜻하게 되었다.(구와야마 · 하카야마, 1981:193) 현장이 구법 여행을 결단한 배경에는 당시 한역 불경에 대한 신뢰 결여와 불경 상호 간의 불일치로 인한 교리 해석에 의문이 있어서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가 구하고자 한 것은 아뢰야식( ālaya vijñāna) 등 유가행파(瑜伽行派)의 독자적 개념을 논증한 유식의 중요한 전적 십칠지론(十七地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완전한 원전이었다. 627년 26세가 된 그는 천축을 향해 구법 여행에 나섰다. 당시 정세가 불안한 서역으로의 출국에는 공식 허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연이은 청원에도 불구하고 그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기근과 수해의 혼란을 틈타 국금(國禁)을 어기고 여행길에 올랐다. 자은전(慈恩傳)』 5권에는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말들(所聞)을 모아 귀국하여 번역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취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귀국 이후 한역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명을 바쳐 구법 여행에 나선 그의 자세에서 교학에 대한 학문적 양심과 불법에 대한 독실한 신앙심이 느껴진다.

  현장 이전에도 다수의 중국인 승려가 천축을 방문했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이가 동진(東晉)의 법현(法顯, 337~422)이다. 그는 중국에서 율장(律藏)이 결여되어 있음을 한탄하여 이를 구하기 위해 399년 장안을 출발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에 들어가 스리랑카를 거쳐 해로로 귀국하였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을 불국기(佛國記)』로 정리하였다. 각지의 상세한 기록은 연대 기록이 불명확한 인도 역사를 아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장은 법현의 천축 여행으로부터 상당한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수의 동행자와 함께 인도로 향한 법현과 달리 현장의 여행은 기본적으로 단독 행동으로 더 힘들고 위험한 것이었다. 다만 법현은 만년에 출발한 것이었지만 현장은 26세라는 육체적으로도 강건한 나이에 출발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기록으로 보아도 그는 자신의 체력과 지력을 감안하여 어학 습득, 행로 선정, 귀국 이후의 번역 등 다양한 점을 고려하고 계획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은 장안을 출발하여 간난신고의 사막 여행을 지속하여 도적과 만나는 등 많은 위기를 넘기고, 도중에 고창국(高昌國) 등에서는 국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사마르칸트, 바미얀(Bamiyan)을 거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간다라와 카슈미르에 머물다 석가의 유적지를 돌아본 후 불교 교리의 연구 거점이었던 날란다 대학에서 도착하였다. 당시 날란다(那爛陀, Nālandā)는 최대 규모의 최고 학부로 학생 수만 해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날란다에서는 주로 유식과 중관(中觀)과 같은 대승불교의 교학이 연구되고 있었는데, 각종 종파의 불교학과 베다, 의학, 수학 등 다른 학문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장은 우선 유가 분야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은 실라바드라(Śīlabhadra, 戒賢, 529~645CE)에게 염원했던 유가사지론』 강의를 15개월간 받고 습득하였다. 현장은 5년간에 걸쳐 날란다에 머물며 불교 교리뿐만이 아니라 베다학에 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아마 그 과정에서 그는 산스크리트어의 정교한 문법과 어원(語原)에 관한 예리한 감수성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경험은 귀국 이후 한역 당시 산스크리트어 원문 이해와 어의에 충실한 번역어 선정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이후 인도 전역을 돌며 각지에서 입수한 다수의 불경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현장은 17년에 걸쳐 구법 여행을 지속하며 645년에 마침내 657부의 불경을 들고 장안으로 귀환하였다.(구와야마 · 하카야마, 1981:244)

  귀국 이후 현장은 낙양에서 당 태종을 배알(拜謁)하였다. 태종은 현장의 박식함과 인격에 감화되어 환속하여 자신의 정사를 보좌하길 권하였으나, 현장은 불경 한역에 생애를 바칠 각오를 밝히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현장에게 홍복사(弘福寺)에 터를 잡을 것을 명하고, 한역 협력자로서 전국에서 우수한 석학을 모아 현장의 한역을 칙명에 의한 국가사업으로 지원하였다.(구와야마 · 하카야마, 1981:295) 태종이 천축과 서역에서 보고 들은 바를 재차 요청하자 현장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상주하였다. 법현의 불국기』와 더불어 이 대당서역기』 역시 당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종교, 문화, 역사를 아는 데 있어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북인도와 네팔에서는 지금도 이 기록을 토대로 불교 관련 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후세에 현장의 여행은 서유기(西遊記)』로 소설화되어 인기를 얻게 되는데, 이 역시도 현장의 위대한 업적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흠모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라 하겠다.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가 서역의 도래승(渡來僧)에 의해 한역되어 점차 중국인 사회에 퍼져나가게 되고, 이 가르침에 감화된 중국인 출가자들이 구법을 위해 목숨을 걸 만큼 그들의 신앙은 깊어져 갔다. 현장은 당시 중국의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여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만족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수준까지 성숙한 중국인 불교도가 나타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불교가 더 이상 외래의 가르침이 아닌 '중국의 불교'로서 그 독자성을 확립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장이 중국에 돌아오면서 중국인이 직접 원전을 잡고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는, 중국인 주도의 역경 시대가 마침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용문헌】

  • 구와야마 쇼신(桑山正進) · 하카야마 노리아키(袴谷憲昭), 『人物中国の仏教 玄奘』, 大蔵出版,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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