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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번역의 역사와 그 변천(16)- <최종회>불경 한역: 이문화와의 만남

동아시아 불경의 번역 수용

by trans2be 2022. 6. 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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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成田道廣(나리타 미치히로), 天理敎 海外部 繙繹課

출처: 《글로컬 텐리(グローカル天理)≫ 제2호(통권 266호), 2022. 2, 4쪽.


불경 한역: 이문화(異文化)와의 만남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구마라집과 현장은 자신의 불경 해석과 언어 능력으로 약 천년에 걸친 역경사(譯經史)에서 한 시대를 축조해냈다. 번역된 불경은 중국에서 불교 수용을 촉진하여 각 시대의 교리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역(漢譯)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다른 문화의 만남이었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언어가 내포하는 고유의 사상과 개념이 서로 잘 어울림으로써 교리가 옮겨진 경우가 있었다면, 변용과 변질을 동반하여 이식되기도 했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상의 차이는 특히 번역이 곤란한 경우에 두드러졌다. 이러한 곤란함에 직면했을 때 구체적인 대처는 유사한 개념을 적용하는 방법, 원어의 음을 그대로 음사(音寫)하는 방법,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번역어를 창안하는 방법, 이상 세 가지로 집약된다.

  표음문자로 기록된 산스크리트어나 간다라어 원전에서 보이는 번역 곤란한 어구는 우선 유사한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낱말의 의미를 옮겨보려 했다. 이는 기존의 개념을 번역어로 채택하는 문화 적응(acculturation) 번역이다. 예컨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뱀-코브라-의 신 “나가( Nāga)”는 불경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왕으로서 등장하지만, 한역에서는 이를 뱀이 아니라 기존 중국 신화에 존재하는 ‘용’으로 바꾸었다. 나가와 용은 원래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쌍방에 존재하는 신비적 영성에 근사한 개념으로서 나가를 용으로 바꾸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나가’라는 것을 번역으로 중국인에게 알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용’이라는 비슷한 개념으로 나가에 대한 이해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원어의 음을 한자로 음사하여 옮기는 음역(音譯)이라는 방법으로는 원어를 이해하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가 의미를 직접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번역어가 다양한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제야 정확한 뉘앙스가 공동체에 침투하게 되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가 정착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아가 어의(語義)가 왜곡될 위험까지도 있었다. 예컨대 ‘궁극의 진리’를 의미하는 “siddhānta”는 ‘이루어진’이란 의미를 띤 ‘siddha’와 ‘최후’를 의미하는 ‘ānta’의 복합어다. 한역에서는 이 단어를 “실단(悉檀)”으로 음역 하였다. ‘단(壇)’이란 글자는 ‘베풀다’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산스크리트어 “dāna”의 음사어로도 번역 · 사용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실단’을 “모든 것(실(悉))을 베풀다”라고 오해하여 ‘궁극의 진리’가 ‘골고루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변용되어, 낱말의 의미가 뒤바뀌어 버렸다. 즉 음사어를 의미 있는 문자의 배열로 이해함으로써 실제 이와 같은 예기치 못한 변용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불교 단어를 개발하는 방법은 그때까지 중국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인 사회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한자를 서로 조합하여 “연기(緣起)”나 “세계(世界)”, “억겁(億劫)” 등 불교 이전에는 용례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어구가 불교 어휘로서 만들어졌다. 이 경우 각각의 한자에서 의미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기에 대폭적인 오해는 피할 수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낱말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용례의 축적을 위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떤 한자를 조합할 것인가라는 점은 완전히 번역자의 감각에 달린 것이었다. 원어와 비교하게 되면 그 절묘한 한역에서 번역자의 원전에 대한 이해도에 종종 탄복하게 된다. 다만 역경승(譯經僧)들이 다양한 불교 어휘를 창안한 결과 많은 혼란 역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구체적 방법은 불경 한역에서만이 아니라 번역 전반에 걸쳐 보이는 방법이다. 번역은 본래 번역되는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에서 수용되고 흡수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번역의 사명인 이상 단지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것만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번역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확함과 충실함에는 단계적 차이가 존재하기에, 어디까지나 이는 상대적인 문제인 것이다. 충실함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애초에 번역은 시도할 수가 없다. 달의(達意)에 방점을 둔 의역을 한 구마라집과 직역에 의한 정확함에 집착한 현장의 번역관은 서로 반대에 위치하지만, 각기 살아간 시대의 불교 이해 정도에 차이가 있는 까닭에 그 번역상의 차이는 그 시대가 요청한 관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더구나 번역을 수용하는 측의 관점에서 보면 원래 수용하려는 것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번역자는 수용될 수 있도록 변용을 가한 개념을 자신의 번역을 통해 제시한다. 그 변용이란 어디까지나 전달을 위한 변용이지 변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수용과 변용의 사이에서 번역자는 두 언어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사상과 문화를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타협점을 찾는다. 다만 어느 정도의 변용은 허용하더라도 치명적인 변질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번역상의 요령은 필요할 것이다. 단어의 의미를 옮기는 것에는 이러한 기술을 가능케 하는 지식과 창조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구마라집과 현장을 중심으로 역경사를 살펴보았으나, 진제(眞諦)나 의정(義淨), 법현(法顯) 등 많은 저명한 역경승은 물론이거니와 어둠에 가려진 다수의 역경승의 존재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약 천년에 걸친 역경사에는 중국에서 불교 포교에 헌신한 노력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주요한 불경은 개역이 반복되었다. 개역을 통해 이러저러한 혼란이 야기되었음은 사실이지만 선대의 번역문을 한층 심화시킴으로써 각각의 시대에 맞는 번역문을 만드는 개역 작업이 중국에 불교가 침투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적 교리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개역 작업은 중국에서 공시적인 교리 전달 수단으로써만이 아니라, 선대의 역경승에서 후대의 역경승으로 이어지는 통시적 교리 전달의 수단으로써도 기능했던 것이다.

  당대(唐代)에는 크리스트교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경교)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배화교) 등, 불교 이외의 종교도 전래되었으나 중국적 변용을 겪지 못함으로써 토착화하지 못하고 소멸했다.(구보, 1979:17) 역경승은 불교의 교리 개념을 일단 인도 고유의 맥락에서 떼어내고 추상화한 후, 한자로 일반화함으로써 한역 불경을 만들어 냈다.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는 한역 불경을 통해 한자로 사고하고 이해 가능한 불교로 변용되어 중국에서 수용되었다. 많은 역경승의 예지와 신앙심의 결정체인 한역 불경은 불교 토착화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문화와의 만남으로서의 불경 한역의 역사는 어쩌면 불교의 수용과 변용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헌】

  • 구보 노리타다(窪德忠), 中國宗敎における受容・変容・行容―道教を軸として, 山川出版社, 1979. ; 도교의 신과 신선 이야기』, 이정환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04.

《연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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